김수영 문학관을 찾아서

문학의 향기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서

글 김은숙 기자

우리 역사의 질곡의 시대를 헤쳐 온 문인들 중에 김수영 시인만큼 치열한 삶을 살다간 문인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비극인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시인이었다.

초하의 햇살이 한여름 못지않게 따가운 6월 하순의 어느 날, 평소 관심이 많았던 김 시인의 흔적을 찾아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2013년 준공을 마친 김수영 문학관은 그의 출생일에 맞춰 그해 11월 27일에 개관했다고 한다. 지상 4층의 단조로운 건물의 1층에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2층에는 시인의 서재와 친필 원고 외에 유품들을 전시하여, 그의 문학과 사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게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인이 생전에 발표하지 못했던 대표 시「시여 침을 뱉어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 여러 시와 산문 육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안내인에게 “왜 이곳에 세웠느냐?”고 묻자 그가 한때 살았던 집터가 있고, 가까운 도봉산 자락에 시비와 유해가 묻혀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여사는 사십오 년간 간직했던 대부분의 유품을 기증했고, 시인의 여동생 김수명 씨도 자신이 보관했던 유품을 모두 내놓았다고 한다.

김수영의 서재
문학관에서 김수영의 시를 읽고 독자들이 남긴 감상.

1921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수영 시인은 일제 강점기와 조국의 해방과 분단, 그리고 6.25 한국전쟁과 4.19 혁명을 겪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체험하면서 감수성 예민한 시인은 인간 실존의 불안과 허망함, 자유의 절실함을 누구보다도 깊이 통감했을 것이다. 해방 후에 모더니즘 적인 문학정서를 지니고 문단에 등단한 김수영 시인은 니체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공감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강한 희망을 걸었다.

1947년 『예술부락』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그는 유고 시 「풀」을 포함하여 그가 남긴 시와 시론은 모두 이백여 편에 이른다. 그의 문학정신은 자유와 사상에 의한 저항문학이다.

박인환 등 모더니스트 작가들과 어울리며 좌와 우의 이념을 넘나들기도 한 그는 6.25전쟁 중에 의용군에 입대하였으나 곧 공산주의에 실망하여 인천상륙작전 후에 의용군에서 탈출한다. 경찰에 체포된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그의 일생에 가장 비극적인 이 사건은 그의 시에 대한 변화와 다양한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60년대 진보적이며 저항적인 그의 시와 문학담론들은 많은 독자들을 환호하게 하였으나 곧 제3공화국의 등장으로 그의 문학적인 언어들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써서 유고 시가 된 「풀」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민초로 대변되는 ‘풀’이라는 자연적 소재를 저항문학의 이미지로 변용시킨 이 시는 역사에 무시되고 밟히면서도 국가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불사조 같은 의식을 표현했다고 평가 받는다. ‘풀’과 ‘바람’의 대립적 이미지에서 ‘풀’은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바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1968년 6월 소설가 이병주, 신동문 시인과 청진동에서 저녁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귀가하던 중 마포구 서강에서 내려 자택으로 향하여 인도를 걷던 그를 버스가 덮쳐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 문단이 얼마나 더 풍성했을까!’ 하는 애석한 마음으로 문학관을 나서다 뒤돌아보니 시대의 아픔을 담은 듯 일그러져 있는 그의 캐리커처가 나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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