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이나 유행가나 무아지경에 빠지는 표정들은 똑같았다

정교하게 다뤄야 할 음악으로 선교를? <추적, 음악선교는 가능한가?>

▲ 김철웅 저, 예영커뮤니케이션

‘경배와 찬양’이니 ‘예수전도단 찬양예배’이니 찬양집회의 열기가 한국을 휩쓸 때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곳에 가면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찬양하는 것은 기본이고, 무아지경에 빠진 표정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신앙이 얕은 탓인지, 나는 그곳이 영~ 불편하였다. 그래도 성령의 만지심이 있었는지,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방언을 터뜨리며 무릎 꿇고 울부짖는 정도는 아니었어도, 뜨거운 마음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내 성격에 이정도면 되었다, 뿌듯하였다.

그 일로 신앙이 조금 성장했다고 우쭐 하였을 때였다. 어렵게 들어간 대중가수 넥스트의 콘서트장에서였다. 넥스트의 리더인 신해철은 그이의 별명처럼 정말 ‘교주’였다.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웅장한 울림에, 심장이 뛰었다. 그의 노련한 지휘에 따라 우리는 뛰었고 달렸고 울부짖었다. 응? 언젠가 느껴본 기분인데? 그래, 예수전도단 찬양집회에서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와 넥스트 공연장에서의, 내 몸, 내 감정의 화학적 반응이 같다니…. 음악은 그렇게 무서운 거였다. 찬양에는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분별력이 없는 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후자의 것만 취하기로 했다.

그때 이런 책이 나왔더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음악, 찬양, 노래의 애매한 경계를 정교하게 파헤치는 <추적! 음악선교는 가능한가?> 말이다. 음악선교는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저자는 “설교하듯 찬양하고, 찬양으로 설교하라”고 말한다. 찬양이 ‘말로 하는 설교’의 앞뒤를 꾸며주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이다. 설교자의 준비 시간을 벌어주거나, 기도회의 배경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설교 그 자체가 바로 찬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음악선교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현실은 거리가 멀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음악이라는 도구가 애매하여, 단순한 감정의 도취를 유발한다는 오해가 없지 않다. 더군다나 ‘음악선교’라는 말부터가 우리에겐 너무 모호하다.
“ … 설상가상으로 신학교에서조차 ‘음악선교’라는 제목의 독립된 수업과목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음악선교와 관련된 전문학위과정이나 관련학과 자체가 개설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실제와 이론 사이의 허전한 빈 공간을 하루라도 빨리 좁혀 나가야 할 때이다.”

저자는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마틴 루터와 바울 등이 보여준 ‘음악선교’를 찾아 나선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어떤 ‘(말)설교’보다도 찬양이 위력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루터는 바울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음악가였다. 사제들로 구성된 성가대만 라틴어 찬송을 부를 수 있을 때 직접 독일어 찬양을 만들었던 그이다. 특별히 저자는 미국 컨콜디아 신학교의 유진 본퀘스키 교수의 주장을 비중있게 소개한다.

마틴 루터의 선교를 추적함에 있어 그의 음악사역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음악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예배에 초대했다. 그는 종교개혁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획기적인 음악형태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 마틴 루터의 이러한 음악사역은 토착민 안에서의 선교음악(the missions hymns in vernacular)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저자는 ‘토착민 안에서의 선교음악(the missions hymns in vernacular)’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는 데, 이것이 루터가 음악선교사였음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악마만이 좋은 멜로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당시 술집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이 즐기던 유행가의 곡조를 찬송가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이제, 노래와 찬양의 구분이 중요해진다. 음악적 요소는 같을 수 있으나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합적이고 총체적 반응과 표현 형태’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인간의 모든 총체적 표현방식인 찬양을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미얀마의 선교사 가족을 취재했을 때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최은득 선교사는 아내와 아이들 4명과 함께 선교가 금지된 미얀마의 한 호텔에서 가족 콘서트를 열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플롯, 클라리넷이 만들어낸 선율은 다름이 아닌 찬양이었다. 체포되기는커녕, 250여 명의 현지인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들었다.

탈북 CCM가수 주혜련 씨는 또 어떤가? 북한군 선전대 출신인 그녀는 김정일에게까지 인정을 받던 실력가였다. 남한에 내려와 복음을 받아들이고 “통일이 되면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소리꾼이 되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어느 날 동서울터미널을 지나는데 걸인이 구걸을 하며 틀어놓은 음악이 그녀의 복음성가였다. 왜 자신의 음악을 틀어놓았느냐고 묻자 “이 노래를 틀어놓아야 사람들이 돈을 많이 준다”라고 했단다. 총알은 한 사람의 가슴만 뚫을 수 있지만, 음악은 강퍅한 마음을 파고들어 만 사람의 가슴을 일렁이게 할 수 있단다.

이런 이들이 바로 ‘음악선교사’가 아닐까? 음악선교는 가능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들이 이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책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음악선교의 정의에서부터, 방법론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찬양사역자나 음악으로 선교하고자 하는 이들이 반가워할 내용들이 촘촘하다.

나는 찬양에 대한 케케묵은 고민을 저자에게 직접 물었다. 찬양집회의 화려함이나, 음악이 주는 감정변화가 예배자의 신앙을 속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넥스트의 콘서트에서도 동일한 감정을 느꼈는데, 찬양을 하며 느낀 이 감정이 온전히 예배에 속하는지 어찌 구분할 수 있을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찬양 집회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오늘 찬양 너무 좋았다’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라는 고백이 나와야 제대로 된 찬양(예배)을 드렸다고 할 수 있겠죠.”

꽤 괜찮은 구분법이었다. 넥스트를 비롯한 대중가수의 콘서트를 보고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찬양집회에서 그런 느낌을 가진 기억도 별로 없다.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찬양집회에 제대로 빠져본 적 없기 때문이다. 요즘도 ‘마커스’이니 뭐니 찬양집회가 많다는데, 10여년 만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볼까?
이범진 유코리아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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