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물’로 만든 기적의 종교? 반역이 필요해

「번역과 반역의 갈래에서」박규태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학생기자 시절에 썼던 기사를 보면 가끔 낯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스트레이트기사에 나의 주관적 평가와 느낌을 덧붙이는 만행을 자주 저질렀다. 육하원칙에 입각해 사실을 전달해야 할 기자가 생뚱맞게 개인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주제 넘게 성경말씀을 인용한 부분도 눈에 띄고, 지울 수만 있으면 전부 삭제하고픈 심정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나아졌느냐, 아니다. 이러한 ‘유혹’에선 언제나 자유롭지 못하다.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를 바꿔가면서 슬쩍슬쩍 내 의견을 내비친다. 일종의 반역인 셈이다. 한쪽자리 기사를 쓰는 이의 마음도 이런데,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박규태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수십 권의 책을 번역하다가 이제야 ‘자기 글’을 터뜨린(가장 적절한 표현) 이가 책의 제목을 ‘번역과 반역의 갈래에서’로 지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0년 이상을 번역가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는가?(역자 주를 많이 달아 출판사로부터 삭제당한 경험도 있단다) ‘번역자’를, 욕구를 비워내며 수련하는 ‘수도사’에 비유할 정도이니, 그간 그의 고뇌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이 책은 대나무 숲에서 메아리치는 고급정보의 보고(寶庫)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울려 퍼지는 숲이다.

저자의 첫 타깃은 성경이다. 19금 이야기는 19금답게 번역하라는 일침이다. ‘찐한’ 장면을 맹맹한 번역어로 처리하여 그 장면이 전하려는 분위기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여의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 아내 리브가를 사랑하여 위로를 받았다는 구절에 주목한다. 창세기 24:26절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어루만지다, 함께 고통을 나누어 지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삭이 자기의 아내를 애무하고, 사랑을 나누며 위태로운 상황을 극복하였음이 ‘위로를 받았다’라는 건조한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번역자들의 자체검열에 걸린 탓이다.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26:8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심정은 더 답답하다.

이 구절에서 개역개정판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았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본디 19금인 히브리어 본문을 모든 연령이 읽을 수 있는 장면으로 바꿔놓은 대표 사례입니다. 어쩌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팔청춘 춘양과 몽룡이가 첫날밤을 치르는 장면을 묘사해놓은 ‘춘향전’만큼이나 찐한 장면인데 물을 섞어도 너무 많이 섞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장면으로 바꿔버린 거죠.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자면 “이츠하크(이삭)가 그 아내 리브카(리브가)를 애무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에 저자는 “19세가 훨씬 지나 알 것 다 아는데도 계속 19금 성경을 읽으려니 정말 맹맹하다”며 ‘있는 그대로’의 번역에 충실하지 못한 성경 곳곳을 고발한다. 어떤 책이든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작업에 매진해온 저자의 입장에선 이런 부분이 치명적 결함으로 다가온다.

답답한 것은 번역 현실만이 아니다. 교회의 현실이 번역의 발목을 잡은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신학자의 책을 번역할 때였다. 짧은 헌사 원문에 들어 있는 ‘Highland Irrigation’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다. 대개 Highland는 스코틀랜드를 가리키는 말로, Irrigation은 메마른 땅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거나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관개를 가리키는 말이었기에 어려운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두 단어를 붙여 써놓으니 번역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다가 원저자에게 물어보는 방법을 택했다. 다음은 그의 답장.

Highland Irrigation은 내가 구사한 위트랍니다. 스코틀랜드는 위스키가 유명한데, 나는 해마다 좋은 위스키가 나오면 이를 EHCC로 가져가 내 친구들과 시음한답니다.
* 필자 주-EHCC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직한 번역은 ‘학문과 우정과 유머 감각과 스카치 위스키를 함께 나눈 EHCC에게 이 책을 바친다’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가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한국 교회의 정서가 문제였다. 결국 스카치 위스키의 번역은 ‘생수’로 둔갑했다. 그리고 역자 주를 통해 ‘스코틀랜드산 생수가 스카치 위스키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유럽은 수질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술도 음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혔다(후에 이 책의 편집자는 생수라는 표현을 ‘활력수’로 바꿔놓았다고 한다).

이런 해프닝을 겪은 저자는 교회의 술 마시는 문제를 다시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번역자의 진가를 드러내는데, 개인적으로 크게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오히려 참 인간이 되신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계실 때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는 말을 들으신 것으로 보아 분명 술의 일종인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어 본문이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가 오이노포테스입니다. 우리말 성경(개역개정판)은 이 말을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번역해놓았는데, 이 번역만 보면 그냥 근사하게, 마치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고 그 행과 맛을 음미한 뒤 우아하게 목으로 넘기는 사람처럼 보이지만(제가 와인을 마시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쓴 게 아니고 텔레비전에서 본 모습을 그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사실 이 말은 “술고래, 술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 대신 포도주를 먹는 나라에서 ‘술꾼’이라는 별명을 얻으려면 얼마나 많이 마셨겠는가.(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하도록 하고) 루터도 맥주를 마셨고, 칼뱅도 포도주를 마셨단다. 칼 바르트, 헬무트 틸리케, 본회퍼, C.S.루이스도 다 흡연자였다는 데 우리는 신자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라는 저자의 질문은 또다시 성경구절 곳곳을 넘나들며 최적의 답변을 만들어낸다. “음주와 흡연 문제는 마치 엄히 지켜야 할 율법 문제인 것처럼 다루면서, 정작 주님이 근본 계명으로 주신 문제는 나 몰라라 한다”며 돈, 권세, 명예 등에 홀린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다른 꼭지들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번역과정에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꼬리에 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중심을 파고든다. 꼼꼼함으로 기존 번역들의 잘못을 바로잡는가 하면, 수도사의 성실함으로 발굴한 여러 작품(영화, 책, 음악 등)들을 아낌없이 공개한다.

아, 저자는 ‘활력수’로 번역된 ‘스카치 위스키’를 꼭 원상 복구하고 싶단다. 번역자로서의 결벽이기도 하겠지만, 온전한 번역을 막는 한국교회의 풍토가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클 것이다.

고백하건데, (저자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언터처블(untouchable)’들을 힘껏 끌어안아주는 예수의 모습이 상상되어 기뻤다. 술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살가움을 예수도 느끼셨구나! 이러면 누군가는 또 불경스럽다, 반역이다 하겠지만 술을 술이라 번역하지 못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반역 말고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주제 넘게 또 주관적 느낌을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는 내 적성이 아니다.

/유코리아뉴스(www.ukoreanews.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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