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을 위한 새로운 지도를 얻다'

양희송의 <다시, 프로테스탄트>

▲ 양희송의 ‘다시 프로테스탄트’

0.누군가 교회의 종언에 대해 말한다면 어떨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애써 교회라 칭한다 할 때 자그마치 2천년에 가까운 교회 역사에 누군가 그 끝을 선포한다면 말이다. 엄두도 내지 못 할 일이다. 교회의 유구한 역사 앞에 어떤 간 큰 이가 감히 교회의 종언에 대해 선포한단 말인가. ‘히치킨스(‘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개신교 비판의 선봉에 서있는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합성한 단어)’라면 모를까.

그런데 한국 교회라면? 이 나라 교회를 최소한 객관적으로 보려 시도하는 이들은 이 질문 앞에 우물쭈물 거리며 그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 뱉으려다 애써 참고 목구멍 깊숙이 넣어두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까지 있어왔고 여전히 있을 것이다. 지금도 유의미한 교회들은 많다.확대해석, 억측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교회의 종언은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 될 것이고, 그 때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1. 한국 교회 위기를 진단하고 비판을 토로하는 말들은 도처에서 흘러 나왔지만 대체로 허공을 갈랐다.허망한 말들이 쌓이면 그 자체로 유령이 된다. 우리는 짜증 혹은 절망이라는 유령을 자주 목격했다. 양희송은 이렇게 말한다.

부적절한 ‘사건’과 ‘현상’의 절망스러운 증가 양상에 대해 개신교 안팎의 개탄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 ‘절망’의 이유들에 충분히 설득되지 못했다. 종종 비판은 표피적이었고, 과녁을 비껴 나갔다. 드러난 현상을 죽 나열한다고 실패한 이유가 자명히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의 뼈대까지 드러내는 결기를 잘 보지 못했다. 절망은,방향을 잃은 짜증 이외에 별것 아닌 경우가 너무 많았다.(p.15)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자못 나는 다른 책을 쓸 것이다라는 선포 같아 보인다. 이어 다음 문장을 보자.

위기가 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똑같은 위기가 다시 찾아와도 이런 무력한 상황은 틀림없이 반복될 것이란 사실이 고통스러웠다.(p.15)

양희송은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호기 넘치는 제목 <다시, 프로테스탄트>라 정해놓고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긴장을 놓치고 방향이 모호해지는 순간 또 하나의 유령을 생산해낼 것이란 사실이 그에겐 마찬가지로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태를 진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선언하는 자들은 대체로 열정적이다.우리는 그와 그의 문장에 가슴설레기도 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겠다! 라며 다짐도 한다. 이 책의 처음 기획 의도도 그러했으리라. 하지만 양희송의 글은 뜨겁지 않다. 오히려 차갑고 매섭다. 책의 속 내용을 들여다보자.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3가지-‘현실파악, ‘오해인지, ‘전환모색이 그것이다. 양희송은 데이터(전국 인구센서스)를 근거로 한국교회 현실을 빈틈없이 진단한다. 지금까지 무수했던 비판, 대안담론이 대체로(저자의 말마따나) 표피적이고 과녁을 비껴 나간 말잔치로 끝났던 이유는 적나라한 현실보다 잠정적 희망을 지나치게 믿었던 탓이다. 모호한 질문은 모호한 답변밖에 줄 수 없다. 진단이 정확치 못하니 이른바 개혁은 자주 개인의 몫으로 돌려놓고 왜 더욱 노력하지(혹은 기도하지) 않았느냐 채근한다.

이런 경우, 기존의 세계관은 곧바로 스스로를 의문시 하지 않는다. 가장 전형적인 대응 방법은, 패러다임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열정이 부족했다거나, 우리의 정성과 희생이 모자랐다고 보는 것이다.상황을 이렇게 인식하면 당연히 현실과 열정을 부추기는 언어와 다짐이 뒤따르기 마련이다.(p.56)

기존의 패러다임은 그것을 수행하는 개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패러다임이 공고해지는 지점은 오히려 수행자들의 부족함에 기인한다. 그래야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희송이 밝히려는 바는 패러다임의 룰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이다. 그는 다음 패러다임을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 중심 패러다임이라 정한다.

2. 한국 교회 무수한 오해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진단을 내렸으니 수술에 들어갈 차례다. 외과의의 메스는 정확해야 한다. 살을 가르고 안에 있는 환부를 도려내야 하니 한 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칼끝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목사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누구도 지적하지 못했던, 또는 너무 많이 말했거나 너무 덜 말한 영역이 목회자들의 문제다. 교회 현실을 비판하는 이들, 대안을 내놓거나 회개의 목소리를 부르짖는 이들이 기실 목회자 자신들이었으니 대안은 자주 겉돌았다. 양희송은 그 가운데 목사의 성직주의를 비판한다.

목사는 성직자인가? 그는 목회라는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 전문성과 존경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유일하게 매개하는 특별한 존재로서 성직자는 아니다.(p.110)

한국 교회 고질적 질병의 뿌리에 성직주의가 있고, 줄기와 가지가 되어 세습성장주의로 이어진다. 이 책을 읽는 독자 가운데 원칙적으로 세습과 성장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주의를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이들(직업이 목사이건 아니건)은 결국 세습과 성장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3. 양희송의 전환모색은 이채롭다. 독자 입장에서라면 실천을 위한 선언들이 속 시원히 나와야 할 시점일 텐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꺼내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모든 주제에 담겨진 설득의 정도를 추출해 내는 기술혹은 설득하기에 적당한 것을 사변적으로 발견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고대 수사학은 의회에서 연설하거나, 재판에서 논쟁하거나, 나아가 청중들의 마음을 이끌어내고 설득하는 기술에 대한 연구다. 다음은 저자가 설명하는 수사학의 세부논의, 차례로 로고스, 파토스,에토스에 대한 설명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기본적으로 그 말에 논리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모순이나 왜곡이 없어야 하고, 새로운 지식에 비추어 늘 갱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p.163)

우리는 개신교가 역사적으로 단순히 어떤 신학에 대한 논리적 찬반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파토스로 더 잘 이해 될 수 있다. 자신과 주변을 포함한 세상의 어떤 측면을 놓고 고통 받거나, 폐부를 찌르는 공감대를 갖는 특성은 파토스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고, 신학적이면서도 신앙적인 것이다. (p. 168)

에토스는 일상에서 쌓아 올린 신용이다.(p. 177)

그는 왜 선언이 아닌 설득을 선택한 것인가. 결말에 다다를수록 재차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 생태계 구축문제와 견주어보면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생태계는 제국이 아니다. 영웅적 개인의 출현으로 구축될 수 없다. 새로운 생태계는 교회구조, 패러다임, 세계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다. 양희송은 기독교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나가 싸우자!’가 아닌 와서 얘기해봅시다를 선택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선언적 문장에 담긴 공허함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전환을 위한 모색의 장소로 독자들을 나오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설득하겠다는 것은 대화하겠다는 말이다.이런 점에서 양희송은 자신의 담론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생각을 달리할 이들도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 더욱 풍성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한국교회에 대한 논의에 첫 불을 지피고자 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자.

4. 그가 제언한 생태계의 기초 구조는 목회자들은 성직주의를 버리고, ‘믿음을 방패삼아 무지를 강변하기를 멈추고, ‘복음주의자는 개인의 죄에만 관심이 있고 자유주의자는 구조적 악만 언급한다는 해묵은 이분법을 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단지 개교회의 의사결정 기구를 수평적으로 만들고, 재정 집행을 투명하게 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개신교 구성원 전체의 의식을 전환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교회들은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와 연합운동을(교회 생태계), 동시에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운동을(지식 생태계), 공공선을 지키고 유효하게 작동시키는 운동을(시민 생태계)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부 구조로 제시한다. 그러니 주제가 새롭게 다가온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인 것이다.시종일관 확언에 찬 문장을 자제하는 그이지만 신생태계의 구상은 도발적이고 한편으로 불온하다.

불온을 언급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국 교회 비판과 대안담론을 제시한 이는 그가 처음이 아니다.이미 각처에서 망가진 교회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어 왔다. 그들에게 양희송의 진단과 설득은 자칫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들은 다 무의미하단 말인가! 둘째, 전통적 목회구조 속 교회와 구성원들은 지금의 형태를 뿌리째 흔들자는 논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양희송의 설득을 면밀히 보자. 그는 기존 패러다임의 시효가 종료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의 무가치성, 나아가 지난 패러다임을 파괴해야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상관없이 나와 내 교회(혹은 단체)는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다. 문제는 사고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의 양식을 바꾸는 일이다. 양희송의 진단이 아플 수 있겠으나 깊은 호흡으로 인정하고 과감히 모험으로 뛰어 들 때 새로운 구조는 탄생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대화의 자리로 나온 이들에게 함께 세속성자가 되자고 말한다. 세속성자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속과 뒹구는’ 자들이다.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거나, 혹은 원수를 사랑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상대적 타자와 부대끼면서 거꾸로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기도 한다. ‘타인의 얼굴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세속성자’로서의 삶을 우리 앞의 부르심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삶에 당신을 초청한다.(p. 221)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양희송의 예리한 진단과 절절한 설득에 마음이 울렸다면 그의 초청에 세속 성자로서 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5. 우리는 새로운 지도를 얻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도 자체가 아니라 독도법(讀圖法)이다. 아무리 근사한 지도라도 보는 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4방위 방향을 가늠한 다음, 어떤 길 위에 서있는지, 주변의 지형지물이 어떻게 되는지 파악할 때 비로소 지도와 내가 연결된다. 양희송은 끊어진 연결지점을 잇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모색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얻은 지도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차례다. 그의 논의에 동의한다면 지도의 남은 부분들을 풍성히 채워나가면 될 것이다. 물론,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터, 그것도 좋다. 다만, 이 주제를 놓고 다시 토론하고 논쟁하고 사유해 볼 것을 권한다. 찬반의 풍성한 논의들이 확대되고 논의될 때 우리는 더욱 정확한 지도를 또 명확한 독도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 종언’,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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