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알츠하이머 환자다

샤워를 하며 손등에 볼펜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다

이야기 하나. 족히 구순은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줄무늬 티셔츠와 연보라 털모자로 맞춘 커플룩을 입고 나란히 앉았다. 할아버지는“사랑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모닝뽀뽀로 인사를 건네고 할머니는 까르르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으신다. 함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전에 살던 동네로의 추억여행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 보낸 후 나란히 잠자리에 든 노부부. 그러나 다시 밝아온 아침, 할머니는 옆에 누운 사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할머니, 옆에 계신 분이 누구세요?”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그런 할머니가 익숙한 할아버지는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오늘도 모닝뽀뽀를 선사한다. “사랑합니다.”라는 달콤한 고백과 함께. 이상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Y>에 나온 어느 알츠하이머 할머니와 그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 둘. 고작 서른의 꽃다운 알츠하이머 처자에게는 자신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다는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다. 그녀는 그의 인생조차 진창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밀어내고, 위선으로 치부하며 상처를 주지만 사실은 자신의 병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정도 병 따위는 너 없이 혼자서도 잘 이겨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장담까지 했지만 이내 그녀는 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뻔뻔한 그녀의 SOS 요청에 두 말 않고 달려온 그. 그는 그녀의 영원한 보호자이자 구원자인 신랑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가 백기를 들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자신을 환자취급 하는 그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다가 결국은 피를 흘릴 정도로 다치고 만다. 자신의 고집으로 일을 벌여놓고는 모든 분노를 신랑에게 쏟아내는 신부. 그런 신부를 묵묵히 치료하고 보호하며, 신부가 볼 수 없는 곳에서만 눈물을 쏟아내는 신랑. 이상 <천일의 약속>에 나오는 30세 알츠하이머 환자 이서현과 그의 보호자 박지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 셋. 서울 Y교회에 다니고 있는 청년 K씨는 다행히도 이미 본인의 병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침 출근버스 안에서 한 QT묵상내용 중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잊을까 두려워 볼펜으로 손등 위에 진하게 써넣었다. “성령님만이 비판할 수 있는 온전한 위치에…”라는 말을 다 써넣기도 전에 중앙시장 정류소에서 무와 배추를 잔뜩 사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척 하며 “어이구 어이구”를 연발하는 중년과 노년 사이의 여인의 속 보이는 언행을 한심하게 여겼다. 점심시간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비싼 커피를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는 지갑에는 한 달 전 그녀를 사로잡았던 문구가 너덜거리면서 간신히 붙어있다. ‘이 지갑의 주인은 누구인가?’(이 달에 그녀는 선교헌금을 하지 않았다). 퇴근 후 북한을 위한 중보기도모임에 가기 전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반 이상을 남겨두고 일어섰다. 귀가가 늦다는 엄마의 잔소리에 시큰둥한 대답으로 하루를 마친 K양은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야 여러 번 비누칠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손등에 볼펜자국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계에 갇힌 듯, 반복되는 이 치매증상. 그녀는 주인을 잊고 사는 종, 은혜를 잊고 사는 죄인, 신랑을 잊고 사는 신부이다. 이상 영적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K양과 그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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