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마음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 임금의 사랑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서로 잘 통하지 않거늘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세종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반포하는 날까지도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을 못 다 완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 다음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날마다 쉽게 익혀 편안하게 쓰도록 하려는 마음일 뿐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무엇보다 이 몇 마디에 주목하였다.

‘어엿비 너겨’ 곧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것이야말로 세종의 마음이었다. 한글이 탄생하게 된 까닭이었다.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 임금의 사랑, 그것이었다. 드라마는 한글 창제의 동기에 지나칠 정도로 천착하였다. 그 마음을 훈민정음 서문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백성을 향하여 ‘어엿비 너기는’ 이 마음이야말로 아버지 태종과도, 필생의 라이벌 정기준과도 다른, 이도 세종만의 길이었다. 아버지는 비웃고, 신하들은 반대하고, 똘복이조차 의심했던 그 길을 흐트러짐 없이 갈 수 있었던 까닭 또한 백성을 향한 따스함이었다.

드라마로부터 좀 떠나서 이야기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세종이 성군인 까닭은 그가 위대한 글자를 창제해서가 아니다. 위대한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서도 아니다. 태평성대를 열어서도 아니다. 세종이 성군인 까닭은 그 모든 업적에 담아낸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군주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가진 임금은 만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그 시간에도 자신의 마음만큼은 지옥을 살아야 했다. 그에겐 언제나 백성들의 아픔이 먼저 보였다. 그 아픔을 쓰다듬고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글 또한 세종의 그 마음이 만들어낸 글자였다. 그 마음이 있어서 어떠한 걸림돌도 피하지 않고 맞섰다. 심지어 중국이란 대국의 간섭과 압박도 하찮았고, 집권세력인 사대부의 근간이었던 성리학도 한낱 곁가지에 불과하였으며, 신분제도조차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음이다. 사랑을 담은 마음이다. 그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움직인다. 스티브 잡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애플은 인문학과 테크놀로지의 교차로에 위치한다고.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없이 핸드폰 하나, 컴퓨터 한 대도 만들 수 없다는 선언이 아닌가.

예수님의 구원이 아름다운 까닭도 죄에 억눌린 슬픈 인간의 굴레를 해방시켜주려 한 소중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러므로 구원의 중심에도 사랑이 있음을 우리가 고백하지 않는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어엿비 여기는 그 마음의 상실 때문이다. 이 본질을 놓친 채 교리를 만들고, 그 교리를 위해 본질인 사람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 아닐까.
누군가 성직자가 되려 한다면, 또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자 한다면,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노래를 부르고자 한다면, 심지어 운동선수가 되고자 하더라도, 또 정치를 하고자 하더라도, 상품 하나를 만들고자 할 때도, 더욱이 기업을 경영하고자 한다면, 교육하고자 한다면, 한 가정을 꾸리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먼저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이 옳다. 그 마음에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따뜻함으로 식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거룩하다.
그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될 일이다. 그 마음을 담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박명철 <CCC편지> <기독신문> <뉴스엔조이> <기독교사상> <아름다운동행>에서 기자 또는 편집장을 지냈으며, 단행본 <사람의 향기 신앙의 향기> <세상에는 이런 주일학교도 있다> 등을 펴냈다. CBS 라디오를 통해 신간 서적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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