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레 미제라블’이 오늘의 ‘레 미제라블’에게 보내는 메시지

▲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올 겨울 문화계의 최고의 키워드는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라 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1862년에 책을 낸 후 15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화제가 되는 것은 1980년에 알랭 부브리와 클로드 미셸 손버그에 의해 제작된 프랑스 뮤지컬을, 뮤지컬 계 최고의 흥행사인 캐머런 매킨토시가 앨범만 듣고 런던 공연을 결정하여 1985년에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이후 이 뮤지컬은 관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27년째 공연을 하고 있는 최장기 뮤지컬이 됐고,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정식판권 계약을 통해 국내 라이선스 공연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또한 이 뮤지컬은 영화로 제작되어 2012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히며 지난 12월 19일 개봉하여 2주가 채 안 된 12월 말 현재 국내 관객만 3백만 명에 육박하는 놀라운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킹스 스피치’ 톰 후퍼 감독의 뛰어난 연출, 그리고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앤 헤서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 에디 레디메인 등 연기와 가창력을 모두 갖춘 배우들의 놀라운 열연이 흥행의 한 몫을 하고 있다. 후퍼 감독은 뮤지컬의 현장성을 강조하여 배우들에게 촬영 현장에서 연기와 함께 노래를 하게 하여 라이브로 녹음을 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영화는 뮤지컬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몇 곡의 순서를 바꾸고 생략함으로써 1부와 2부가 나누어지는 뮤지컬의 흐름을 보다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는 점, 뮤지컬에서 표현해내는 데 한계가 있는 장면들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화면 클로즈업을 통해 배우들의 잔잔한 감정표현과 모션까지 잡아 냄으로써 어떤 측면에서는 뮤지컬 이상의 감동을 주기도 한다.

1815년 빈곤에 지쳐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투옥된 장 발장은 19년 옥살이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된 채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갈 곳 없이 노숙하다가 마리엘 주교의 호의를 입지만 주교관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주하다 잡혀 온다. 그런 그를 마리엘 주교는 기꺼이 용서하고, 장 발장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한다.

가석방 증서를 찢고 전혀 새로운 사람 행세를 하면서 열심히 살던 장 발장은 수 백명 직공을 거느린 공장주이자 시장이 된다. 종업원 간의 다툼으로 억울하게 쫓겨나간 판틴의 사연을 알게 된 다음, 죽은 그녀를 대신하여 판틴의 딸 코제트를 맡아서 기르게 된다. 자기 대신 사형당할 상황에 처한 죄수를 구명하고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도망자 신세가 된 장 발장은 자신을 맹렬히 추격하던 형사 쟈베르의 눈을 피해 수녀원에 들어가 숨어 지낸다.

1832년 프랑스는 새로운 왕의 학정으로 전국이 분노로 들끓는다. 학생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꾀하고, 그 와중에 혁명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리우스는 우연히 마주친 코제트에게 한 눈에 반한다. 에포닌의 도움으로 마리우스는 다시 코제트를 만나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그런 마리우스를 혼자 좋아하는 에포닌은 쓸쓸해한다. 이 때 에포닌의 아버지 테나르디에와 부랑자들이 장 발장의 집을 습격하려는 것을 에포닌이 제지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장 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피신한다.

혁명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마리우스는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가브로쉬가 전해온 마리우스의 편지를 통해 마리우스와 코제트 간의 관계를 알게 된 장 발장은 마리우스를 어떻게든 코제트에게 돌려 보내고자 지원병이 되고, 첩자 노릇을 하다가 잡힌 쟈베르를 풀어준다. 정부군의 월등한 화력과 민중들의 비협조로 혁명가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장 발장은 심한 부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피신시키다가 다시 쟈베르와 맞닥뜨린다. 내면의 갈등 가운데 쟈베르는 장 발장을 보내주고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고 만다.

장 발장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마리우스에게 전부 털어놓고 수녀원으로 은둔한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와의 결혼식 날 테나르디에 부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장 발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수도원으로 달려가지만, 장 발장은 코제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편지를 건네고 숨을 거둔다.
이러한 방대한 내용이 관객들에게 2시간 40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노래로 전달된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노래로만 이어지는 ‘sung-through musical’로 오페라와 형식이 유사하다. 이 뮤지컬의 매력 중 하나는 동일한 멜로디가 전혀 다른 배우에 의해 전혀 다른 노래로 불려진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노래들은 뉴스 보도, 대통령 유세, 광고음악, 그리고 최근에는 김연아 선수의 피겨 스케이팅 음악 등으로 쓰였다.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로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빅토르 위고가 이 작품에 대해 했던 말이다. 1천3백 페이지가 넘는 원작(국내에는 민음사, 펭귄클래식, 범우사 등에서 다섯 권으로 출판)의 방대한 소재와 주제 의식은 뮤지컬에서 빠짐 없이 표현된다. 무려 스물 세 명의 독립적인 배역이 등장하는 뮤지컬은 매우 드문 일이다. 사람 수만큼이나 죽음 또한 많이 등장한다. 미화된 비현실적 죽음이 아니라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인 죽음이다.

이 대작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객 각자의 입장과 삶의 경험이 다른만큼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장 발장의 고뇌와 변화된 삶, 쟈베르의 집념과 갈등,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순수한 사랑, 에포닌의 처절한 짝사랑, 그 외에 혁명가들의 투쟁 등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거와 그로 인한 영향으로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과 오버랩 된다는 반응이 많다.

무엇보다 나의 관점은 ‘용서와 포용’이라는 측면이다. 장 발장은 마리엘 주교를 통해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 받고 포용된 다음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미움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시선은, 자기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해 내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판틴, 코제트와 같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기대할 수 없는 무력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테나르디에 부부와 같이 자신 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그리고 평생 동안 집요하게 자신을 잡으려고 추격해 온 쟈베르까지 용서하고 포용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저 소설과 뮤지컬, 그리고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드물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세상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용서하고 양아들 삼았던 손양원 목사 같은 분이 그러하다. 장 발장은 삶의 어려운 위기 앞에서 기도하면서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God on high)께서 함께하심을 고백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심을 아는 성도 만이, 사람들이나 세상이 나에게 주는 영향과 상관 없이 끝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움직이는가? 맹렬한 증오도, 투철한 이념도, 강한 정의감도 사람과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바로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비롯되는 용서와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진보적 가치’와 다르다.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세상이 아름답고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그 분의 뜻에서 벗어난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상관 없이 본질적으로 ‘어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삼으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에게 세상의 불의를 수수방관하면서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에게는 이 땅의 국적과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국적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보다 정의와 공평이 넘치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갈 책임 또한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도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과 현실이 캄캄하고 악취가 나더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용서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란 먼저 은혜 받은 자임을 자각하고 기꺼이 주님의 ‘노예'(slave)가 되어 이 땅에서 용서하고 포용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이 보다 친절하게 대해 주면 나 또한 그러겠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이 아니라, 주님께 값 없이 받았기에 기꺼이 흘려 보내는 방식으로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고 또 사람들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존재혁명’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2백 년 전의 프랑스 못지 않게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 “인간의 가슴엔 다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공백이 있다.” -파스칼. 내 생각보다 하나님 보시는 대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에게도 나와 동일하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진정한 성도이다.

김영훈 제자들교회 집사. 독서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고, 교회에서 USB(Use Self Brain)라는 독서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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