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욥과 가룟 유다, 절망의 끝에 선 당신에게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가장 전통적인 성경 본문은 ‘욥기’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 욥은, 급기야 자신이 모태에서 죽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말까지 한다. 욥이 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극단적인 고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혹시 지금 하나님도 나에게는 더는 아무 것도 못하실 것이라는 절망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지 않는가?

뮤지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데뷔작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1)를 통해 이 민감한 주제를 다뤄 보고자 한다.

록 음악은 40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이 뮤지컬이 발표되던 당시에만 하더라도 사회에 부적응하고 반항적인 젊은 세대들이나 듣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였다. 그런데 웨버는 과감하게 데뷔작에 록 음악을 사용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작품에는 ‘록 뮤지컬’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이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반발은 웨버와 작사가 팀 라이스의 인물 묘사였다. 뮤지컬 제목에서 뒤에 ‘슈퍼스타’라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까지 붙은 예수 그리스도는 임박한 죽음 앞에 고뇌하면서 창녀의 품에 안겨 위로 받고자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나온다. 더욱이 그 역할을 주로 록이나 헤비메탈 뮤지션들이 맡아서 절규하듯 노래한다.

예수님 보다 더한 반발을 불러 일으킨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악한 자로 인식되고 있는 그가, 이 작품에서는 우유부단한 예수를 자극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나서게 하여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해방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자신의 배반으로 고난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고통 가운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못지않은 숭고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뮤지컬의 슈퍼스타는 예수님이라기 보다는 가룟 유다로 보일 정도이다.

▲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식 홈페이지.

나 또한 뮤지컬을 봐 온지 꽤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을 기피했던 이유가 바로 그럼 점들, 특히 가룟 유다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최근에 나가수 등으로 록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들었고, 우연찮게 읽게 된 김영봉 목사의 <대야와 수건>이라는 요한복음 13장을 본문으로 한 설교집을 읽으면서 가룟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라는 제목의 설교는 독특하게 가룟 유다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었다. 뮤지컬의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할 수 있는 것은 ‘가룟’(Iscariots)이라는 이름이 ‘시카리’(Sicarii)라고 불리던 비밀 자객단원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품 속에 단도를 품고 다니면서, 유대 민족을 학대하는 자들을 처치했다. 갈릴리 지방은 오랫동안 혁명의 중심지였기에,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되고 금전출납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에게 불안을 느낀 유다는 급기야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예수님을 몰아넣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저항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그저 ‘저는 도적이라’(요 12 : 6)는 한 마디로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실제의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는가 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이후의 그의 행동이다.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하지만 이 후에 진심으로 회개하여 다시 사도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에 반해,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쓰실 기회를 스스로 없앴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부딪혔는데, 한 사람은 부서진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전혀 무용한 것으로 드러나서 더 이상 살고 싶은 소망이 없게 되는 그 지점이, 바로 내 모든 고집과 주장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복종할 때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쪽에서 보니 커 보이지,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하찮아 보일 정도로 작은 죄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정도로 큰 죄도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마지막이다 싶을 때라도, 너무 늦었다 싶을 때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영봉 <대야와 수건> 158쪽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문제도 여전하다면 여전히 힘들고 결국 절망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 : 1 ~ 2)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지만, 시편 기자는 산을 바라보지 말고 진정한 근원이시며 도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한다.

C.S. 루이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영국의 여류 신학자이며 문학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 1893-1957)의 <창조자의 정신>(The Mind of the Maker, 1941)이라는 책을 통해 지혜를 빌려 볼 수 있다.

“우리는 탐정 소설가가 아니라 발명가 즉 창조적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창조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 ‘11장. 문제와 해결’ 중에서

인생의 문제들은 탐정 소설 속의 문제처럼 단 하나의 단정적인 해결책을 찾아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명가나 예술가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가 아닌 새로운 창조를 위한 매개체로 보는 것처럼, 우리 또한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것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가야 한다. 훗날 그 문제들은 그 앞의 그림과 그 뒤의 그림을 연결시켜 주는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전 15:10)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빌 1: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롬 1:17)

너무 멀리 왔다고 절망하는 바로 그 때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돌이키길 원하시는 가장 빠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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