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최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1925)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주는 충고의 말로 시작한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죄로 인해 형편 없이 망가져서 스스로를 구원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완전한 불량품’인 우리를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희생으로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요체이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가장 문턱이 높은 곳으로 비춰진다.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기에 세상의 계층은 곧 교회의 계층이다. 애써 용기를 내어 찾아온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기도 전에 세상보다 더욱 냉혹한 교인들의 시선을 견뎌내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다.

가장 극단적인 반응은 기독교에서 명백하게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성애, 자살에 대해서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도저히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아갈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긴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자신의 뒤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판단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고, 무익한 종일 뿐인 우리는 그저 마음을 다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뿐이다(벧전 1:22).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1774년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2000년에 뮤지컬로 각색하여 호평을 받은 동명 창작 뮤지컬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의 어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의 주인공 베르테르를 만나 본다.

창작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2012년 공연됐던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포스터. ⓒCJ E&M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998년 고선웅 작가가 괴테의 원작소설을 각색하여 뮤지컬로 만들어 2000년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후 10 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우리 창작 뮤지컬의 백미(白眉)이다. 주인공인 베르테르 역은 조승우, 엄기준, 김다현, 송창의, 박건형 등 한국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꼭 한 번씩 거쳐 가는 필수적인 배역으로 손꼽힌다.

베르테르가 로테와의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한다는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을 따르고 있지만, 뮤지컬은 극을 진행하는 방식이라든지 부각되는 등장인물, 그리고 강조되는 상황을 다르게 하여 원작보다 훨씬 심화된 감동을 준다. 극중 인물들의 노래는 인간의 음성과 유사한 현악 반주로 더욱 깊은 울림을 증폭시켜 전해 줌으로써, 관객들에게 극중 인물들의 감정이 바로 공연을 보고 있는 자신의 감정과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베르테르는 요양을 온 발하임이라는 마을의 무도회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상냥하며 발랄한 아가씨 로테를 만난다. 정열적인 감성의 소유자 베르테르는 우연히 만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밤새 설레는 마음으로 초상화를 그려 다음날 아침 불쑥 로테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그림을 선물한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감사의 표시로 책과 푸른 리본을 선물하고, 로테의 마음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 베르테르는 불꽃같이 강력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로테에게는 이미 마음 깊이 사랑하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잠시 후에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감정이 심하게 흘러버린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베르테르는 주인 마님을 사랑하게 된 카인즈라는 하인에게는 그 사랑을 고백할 것을 격려하지만, 정작 자신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가가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면서 발하임을 떠난다. (1막)

▲ 베르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CJ E&M

베르테르는 미칠 듯한 그리움에 다시 발길을 발하임으로 돌리지만, 이미 로테와 알베르트의 결혼식은 끝났다. 이제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감정은 사랑을 넘어 광기로 변한다. 이러한 베르테르를 로테는 너무나 두려워 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린다. 여주인과의 사랑을 이뤘으나 재산을 탐내는 여주인 오빠의 간계로 쫓겨나게 된 카인즈는 끔찍한 보복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베르테르는 법관인 알베르트에게 자비를 간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할 수 없게 된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된 로테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권총을 머리에 겨누어 방아쇠를 당긴다. (2막)

1774년에 출판된 괴테의 원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베르테르의 모습에 공감한 수 많은 젊은 세대의 자살이 급증하는 일이 벌어지는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일부 지역에서는 이 책의 발간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베르테르 효과’

200년이 지난 1974년에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스(David Philips)는 이와 같이 자신이 모델로 삼거나 존경하던 인물, 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명인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따라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최근 기독교인이라 알려진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은 교계에 그 동안 취해 왔던 방관과 정죄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의미 있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한 기독교자살예방센터 라이프호프가 대표적이다. 아직까지 자살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교인들의 고민을 직접 상담하고 나누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이 사회 속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관이 되길 기대하고 성원한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 속 고민을 상담이라는 방식을 통해 쉽사리 떨쳐내기는 어렵다. 설령 완벽한 시스템이 있다 하더라도 승자독식 사회 속에서 날마다 잔혹한 패배와 상처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구성원들 각자에게는 생명의 근원된 자신의 마음을 지켜가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잠 4:23).

캐나다의 아동문학가 L.M.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의 1874년 작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을 바탕으로 캐나다에서 1985년에 제작된 TV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있다.

늙어가면서 농장 일이 힘에 겨워진 매튜와 마틸다는 고아원에 자신을 도울 소년을 구하였으나 행정적인 착오로 10대 소녀인 앤이 도착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상상력과 감수성 풍부한 앤은 그린 게이블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꿈과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 모든 것은 절망으로 뒤바뀐다.

하룻밤 자고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끔찍한 현실에 봉착한 앤은 식욕조차 잃어버려 밥 먹자는 마틸다의 말에 “절망의 수렁에 빠졌기에 소화조차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마틸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To despair is to turn your back on God.)

자신의 상황과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마틸다의 신앙이 너무나 고지식하고 비인간적인 것일까?

이러한 문제를 다룬 저작이 C.S 루이스의 초기 변증서적인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1943)이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이 존재와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기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연법(루이스는 이를 ‘도(tao)’라 규정한다)에게 주어져 있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생각이란 각종 권력과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조작자들'(conditioners) 의 무제한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먹힘으로써 자연에 의해 정복된 이러한 상태를 루이스는 ‘인간 폐지’라고 한 것이다.

감정은 흘러가는 것일 뿐 처음부터 항상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춘 복합적인 존재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일시적인 감정과 충동만이 자기 자신이라고 부추긴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기도 하다(렘 17:9). 묵시가 없으면 사람은 방자히 행하게 된다(잠 19:18).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따름이다.

극중에서 베르테르가 발하임을 떠나기 전과 스스로 생명을 끊기 전 부르는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당신의 그 미소 만큼씩 내 마음은 납처럼 가라앉는데
그댄 어쩌면 그렇게도 눈 부실 수 있는지
당신의 그 환한 빛 만큼씩 내 맘엔 그림자가 지는데
나 그대 이제 이별 고하려는데
내 입술이 얼음처럼 붙어버리면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발길이 붙어서 뗄 수가 없으면

<발 길을 뗄 수 없으면> 유튜브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4IsJf_SUKSg&list=PL6899F70EF0FBF6FC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한 자신의 뜨거운 감정이 지금 자기 자신을 이루는 전부이기에,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게 된 사랑으로 납처럼 가라앉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감정 상태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괴테는 원작에서 다음과 같이 베르테르의 감정을 적고 있다.

“1월 20일(로테에게)

사랑하는 로테,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조그만 농가의 한 방, 몹시 궂은 날씨를 피해 왔습니다. 을씨년스러운 이 곳, 내 마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 곳의 낯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때에 눈과 우박이 사납게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그리운 사람이여, 감각은 메말랐고, 한 순간의 충만감도 없으며 행복 또한 없습니다. 오직 공허만이지요.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해서 죽는다는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로테, 나는 지금 이 옷차림 그대로 가고자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로테, 잘 있어요.

의사가 왔을 때, 가엾은 베르테르는 바닥에 쓰러진 채,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맥은 뛰고 있었으나 손발은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43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나라

하루에 무려 43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한국……. 문명이 앞선 선진국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왔으나, 정작 도착한 곳은 선택 받은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살아나갈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야만스러운 후진국이었다. 각종 매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사람들을 부추겨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꾸게 하고 무책임하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다시 한 번 빨강머리 앤의 명대사를 인용해 본다.

“엘리사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애니메이션 중에서)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할 때마다 나 자신의 생명, 능력, 소망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마음 깊이 분명히 확정하는 성도야말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시 119:105)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가 가야 할 곳을 인도하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저 멀리 있는 곳에 대해서는 방향만 제시하실 뿐 그곳에서 실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리시고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오직 순종으로 그 길을 택해 걸어가는 과정에서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용규 <내려놓음>

내 인생에서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때때로 ‘정말 하나님이 너무하시다’ 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께만 구원하심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나 자신과 상황에 대해 철저히 낙망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붙잡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벼랑 끝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만 날개가 있음을 알게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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