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삶으로 읽는 성도의 삶’

현재를 살아야했던 천재에 대한 이야기, 뮤지컬 <모차르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산문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는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든지 문화적인 이유에서든지 사람들은 20세기 최대의 도시인 파리로 몰려들지만, 시인의 예리한 감각에 비춰진 대도시 파리는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튀기는 기름냄새, 불안의 냄새로 가득한 곳이었을 뿐이다.

릴케와 같은 탁월한 재능의 청년에게도 파리는 삶의 아픔과 구차함, 그리고 불안함만이 느껴지는 곳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실제로 그는 작가의 창작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시대에서 평생을 홀로 최저생계비의 절반에 못 미치는 돈으로 힘겹게 살았고, 그렇게 쓸쓸히 그의 생명의 불꽃은 사그라들고 만다.

문학가나 예술가들의 재능이 각광받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경매가로 팔려가는 그림을 그린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하지만 정작 생전에는 그림 하나 팔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소원이 자신의 그림을 그림 그리는데 사용한 물감 값 이상만 받고 팔아보는 것이었을까?

지금은 마치 일반명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음악가 모차르트의 삶은 어떠했을까? 불행히도 그가 살았던 18세기 유럽에서 음악가는 그저 왕이나 영주들에게 고용된 하인 정도로만 인정됐다. 귀족들이 요구하는 노래를 써 내야만 했고, 그나마 그들이 피땀 흘려 작곡한 음악들은 귀족들의 연회장의 배경 음악으로 한 번 연주되고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시대에 자유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모차르트의 삶은 투쟁 그 자체였다. 모차르트의 치열했던 삶과 고뇌를 뮤지컬 <모차르트!>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1999년 클래식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뮤지컬 <모차르트!>(Das Musical Mozart!)는 201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어로 된 공연이 초연되었다. 뮤지컬 배우 임태경, 박건형, 박은태, 그리고 인기 가수인 김준수는 박제된 천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기를 꿈꾸는 모차르트의 진정성을 보여 주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특히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조연급 배우로 여겨져 온 박은태 씨는 이 뮤지컬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은차르트’ 라고 불리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영상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JLwPCD9fHUg

이 외에도 한 편의 명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과 스케일이 느껴지는 무대 디자인, 28인조 오케스트라가 선보이는 클래식과 록의 크로스오버 음악, 500여 벌의 화려한 의상, 모차르트 당시를 고증하여 제작한 특수 가발과 가면, 소품 등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요소가 많은 공연이다.

그 중심에는 역시 천재성과 순수함을 동시에 가진 음악가 모차르트가 있다. 다른 배역들이 18세기 풍의 의상과 가발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모차르트만은 마치 현대의 록가수와 같이 청바지와 레게머리의 함으로써 자유분방한 성격을 표현해 낸다. 이러한 모습은 모차르트를 청년 관객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아주 친숙한 친구처럼 여겨지도록 만든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궁중 지휘자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귀족들에게 어린 아들의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며 후견인을 모으려고 애쓴다. 자라서 청년이 된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콜로레도 대주교의 명을 받으며 음악활동을 하지만, 대주교의 요구대로 작곡을 하는 일에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된 그는 자유를 갈구하게 된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 온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만난 베버 가족의 유혹에 넘어가 빈털터리가 되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읽게 되면서 절망에 빠진다. 후원자인 발트슈타텐 공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빈으로 오지만, 대주교의 모략으로 매번 연주 기회를 놓친 모차르트는 그와 맞서게 되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 사교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한 모차르트는 빈에서의 화려한 삶에 빠져서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와 누나의 존재를 점차 잊어버리고 만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명을 받아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 데려오고자 하나 모차르트는 이를 거절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결별한 후 충격을 받아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던 모차르트에게 낯선 남자가 다가와 <레퀴엠>을 써 달라는 주문을 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술피리>로 성공을 거둔 다음 혼신의 힘을 다해 <레퀴엠>을 쓰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뮤지컬 <모차르트!>는 철학의 나라에서 만든 뮤지컬답게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주교라는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눈에 보이는 구속이라는 것.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 자신을 얽매여 놓게 한 결정적인 것은 세상이나 가족이 아닌 어린 시절 표출되었던 그 자신의 천재성이다. 뮤지컬은 천재성의 표상인 ‘아마데’와 현실의 ‘볼프강’이 함께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아마데가 볼프강의 피를 찍어 작곡하는 장면은, 자신의 천재성을 소진시켜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나는 시인이 아냐 또 시인처럼 말도 못해
그저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 마음 가는 그대로
나는 화가도 아냐. 빛과 어둠 아름다움도 그려내지는 못해.
나는 꿈 속에서만 희망 그리지.
나는 배우도 아냐. 난 연기할 줄 몰라. 난 가식 없이 살고 싶어.
있는 그대로, 있는 내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네.
이런 나의 모습을…….

– <나는 나는 음악> 중에서

흔히 천재라고 하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느 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은 오히려 다른 영역에서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무능할 수 있다. 모차르트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모차르트라는 인물은 음악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인간관계나 경제관념 등 현실감각이 현저히 떨어졌고, 의심하지 않고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용당하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점이 아버지 레오폴트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서 떠나려는 모차르트를 만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저 잘츠부르크의 궁정 음악가 자리를 지키면서 평생을 살았어야만 했을까?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이상과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모차르트에게 후원자인 발트슈타텐 공작부인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영상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y1cGUUAa0QY

아주 먼 옛날에 한 왕이 아들과 함께 살았다네
세상을 두려워하면서
늘 왕자 걱정에 잠들 수가 없었지
성벽을 높이고 문도 굳게 닫았네
어느 날 바람결에 실려온 그리움
혼자 있는 왕자에게 속삭였네

북두칠성 빛나는 밤에 하늘을 봐
황금별이 떨어질 거야
황금별을 찾기 원하면 인생은 너에겐 배움터
그 별을 찾아 떠나야만 해

왕은 말하곤 했지 세상을 파멸로 가득 찼다
난 결코 밖을 보지 않아
저 세상에서 널 지키겠다 하셨네
성벽을 높이고 문도 굳게 닫았네
하지만 뛰는 가슴 멈출 순 없어
왕자는 성벽 넘어 세상 꿈꾸었네

자 여길 떠나 저 성벽 넘어
그 별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야 해
험한 세상 너 사는 이유
이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너 혼자 여행 떠나야만 해

사랑이란 구속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때로는 아픔도 감수해야 해
사랑은 눈물 그것이 사랑

황금별이 떨어질 때면
세상을 향해서 여행을 떠나야 해
북두칠성 빛나는 밤에 저 높은 성벽을 넘어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그 곳으로
저 세상을 향해서 날아가!
날아올라!
– <황금별> 가사

이 세상은 꿈을 꾸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불구덩이처럼 가혹한 현실 속에서 온 몸을 뒤틀면서 견뎌내야만 할 상황이 훨씬 많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사 53:3)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인생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성도가 된다고 세상의 모든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동으로 보호되는 특권이 생기지 않는다. 이 세상은 성도가 환난을 당하는 곳이다(요 16:33). 오히려 성도이기 때문에 감내해야만 하는 아픔이 더욱 많다.

고통의 세상 속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일상은 일상으로 두라. 신앙의 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복으로 바꿔 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꿔 놓아서도 안 된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뎌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된다(…중략…) 일상사, 그것은 배우기 어려워도 배워야만 하고, 영원한 삶이라는 참 축제에 우리 힘 아닌 하느님 은혜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 칼 라너(Karl Rahner) <일상>

탁월한 가톨릭 영성신학자 칼 라너의 말처럼 성도들은 무거운 일상의 삶을 조작을 통해 경감시키려 들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견뎌내야만 한다. 삶의 고통을 통해 성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온전히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찾기 원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좌절과 고통이 어떠하건 간에 우리를 향한 목적, 즉 우리의 현재 삶에서 완전한 충족(그것이 어떤 것이건)을 찾기 원하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어떤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을 하나님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인간적 운명 곧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위대한 모험을 성취할 수 있다.”
– 폴 투르니에 <모험으로 사는 인생>

복음이란 세상의 온갖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꿈꾸게 하는 메시지이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슬픔이 사라진 ‘또 다른 삶’이 아니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 시간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최선임을 인정하게 된다.

모차르트, 릴케, 반 고흐와 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도 산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인생이 쉬워지지 않는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 같이 주님과 연합된 사람만이 주님 주시는 내적 생명력으로 인하여 능히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저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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