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끄는 낭인들이 갑작스런 해산을 통고 받고 우왕좌왕 하던 조선 훈련대(訓鍊隊)를 앞세워 궁궐을 습격하고 왕비를 시해하는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역사에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단지 궁중의 여인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탁월한 지혜와 용기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왕실을 한 몸으로 버텨가던 그녀의 죽음 후에 조선왕조는 급속도로 기울어 10년 만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5년 후에는 멸망하고 만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追尊) 된 중전 민씨의 순국 1백주년이 되는 1995년을 맞아 한국 공연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 프로젝트가 기획됐다. 바로 <명성황후>(The Last Empress) 라는 제목의 창작 뮤지컬이 제작된 것이다.

창작뮤지컬의 역사를 새롭게 쓰다

명성황후당대 최고의 작가로 각광 받던 소설가 이문열이 쓴 각본집 <여우사냥>을 원작으로 양인자, 김희갑 부부가 곡을 붙이고,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가 연출을, ‘칼마에’ 박칼린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작품이 초연되던 1995년은 온통 이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초연된 지 어느덧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 한국 대형뮤지컬 역사상 최초로 1천 회 이상 공연되었고, 미국, 영국, 캐나다, 중국 등에 이어 마침내 지난 2009년에는 일본에서도 공연되어 일본인들에게 잊혀진 역사의 비극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깊은 색감과 다양한 질감의 천으로 조명과 어우러진 당시 분위기와 풍습을 200여 벌의 의상, 태껸을 사용한 역동적인 안무와 우아한 궁중무용을 활용한 몸짓은 한국적 미의 극치를 맛볼 수 있게 한다. 이태원, 이상은, 이희정, 조승룡 등 탄탄한 음악성을 갖고 있는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의 심금을 깊이 자극한다.
<동영상 보기, 무과 시험> http://www.youtube.com/watch?v=TK_Y2EhDAAQ

서양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한국 고유의 단아함과 품위로 고품격 뮤지컬이 가능함을 알려준 <명성황후>는 한국 창작 뮤지컬의 수준에 의심을 품었던 관객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뮤지컬의 종주국인 영국 최고의 평론가들로부터 세계 5대 뮤지컬 중 하나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조선 후기 국제 정세 속에 휩쓸린 조선왕조의 위태로운 정세가 담겨 있다. 작품은 명성황후가 중전으로 살아온 30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삽화처럼 엮어간다.

주인공인 명성황후 역할을 그녀의 굳건한 의지와 여성적 섬세함을 동시에 표현해내는 메조 소프라노로, 자애로운 성품이나 나약한 임금 고종을 테너로, 주인공에 대비되는 역할들인 대원군과 미우라를 바리톤으로 하고, 별다른 대사 없이 총 44곡의 노래에 담아 낸 ‘송 쓰루 뮤지컬’(song through musical)의 형식은 <오페라의 유령> 이나 <레 미제라블>과 유사한 오페라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영상과 함께 1945라는 자막이 비치는데, 연도가 하나씩 줄어들다가 1896에 멈추면서 무대가 밝아진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는 히로시마 법정에서 미우라와 살인범들은 천황을 향한 충성을 노래한다.

이어서 무대는 30년을 거슬러 올라가 1866년 열 여섯 살의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되는 장면이 전개된다.
<동영상 보기, 왕비 오시는 날>  http://www.youtube.com/watch?v=AgywHRlL0uo

그 무렵 조선은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내정개혁과 쇄국을 국시로 나라를 운영하였고, 고종은 그저 하릴없이 궁녀들과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왕비를 돌아보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지혜와 인내로 임금의 사랑을 되찾고, 친정(親政)을 권하여 대원군의 섭정을 폐하고 나라의 문을 연다.

하지만 준비 없이 긴급하게 이루어진 개화는 온 나라를 왜인들의 횡포로 인해 몸살을 앓게 했고, 신식군인 별기군의 창설로 푸대접을 받던 구식 군인들은 13개월 만에 받은 쌀의 절반이 겨와 모래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군란(軍亂)을 일으킨다. 왕비는 난을 피해 시위별감 홍계훈 장군과 함께 피신하고, 조정에는 다시 대원군이 집권하게 되지만 그 또한 청나라 군에 의해 중국으로 압송된다.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배상금을 지급하라면서 임금을 협박하고 있을 때 왕비가 다시 대궐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1막이 끝난다.

12년이 흘러 대연회가 열리는 장면으로 2막이 시작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되자 명성황후는 일본 세력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수세에 몰린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중심으로 ‘여우사냥’을 모의한다. 홍계훈 장군은 왕비에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린 다음 궐 안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 ‘백성이여 일어나라’ – 비탄에 잠긴 백성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노래

상궁들이 피신을 간청하지만 왕비는 임금과 세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면서 거부한다. 낭인들은 왕비의 처소까지 침입하여 왕비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궁녀들을 참살한다. 마침내 명성황후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비탄에 잠겨 있는 백성들에게 명성황후의 혼이 나타나 모두 결연히 일어나 험난한 앞날에 맞서줄 것을 당부하고 조선의 무궁을 기원하며 막이 내린다.

두 시간 반 남짓 되는 그리 길지 않은 공연 시간에 담아내기에는 인물과 사건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혼인과 무과시험, 궁중연회와 회전 무대를 잘 활용한 시해(弑害) 장면 등에서 충분히 뮤지컬다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서 여타 뮤지컬과 같은 엔터테인먼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로 조선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 당하는 역사적 비극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막에서 세자를 얻기 위해 벌이는 굿판 또한 관객들을 불편하게 한다.

무엇보다 불편한 점은 ‘명성황후’(明成皇后·The Last Empress)라는 명칭이다. 반 만년 한민족 역사상 최고 통치자의 명칭이 황제라 칭해졌던 시기는 고려 광종 시대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일본 또한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였다는 국제적 비난 여론에 직면하여 다소 간섭이 소원해지자, 을미사변에 관련된 친일 내각과 훈련대 장교들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방책으로 칭제(稱帝)를 들먹거린 것이다. 자신을 죽인 원수들에 의해 붙여진 허울 좋은 명칭이었을 뿐, 그들에 의해 황제라 불린 임금은 그 어떤 시기의 왕보다 무력하였다.

명칭 뿐만 아니라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 야욕에 결연히 맞선 그녀에 대한 불편한 심경으로, 오랫동안 명성황후를 ‘민비’(閔妃) 라는 명칭으로 격하시켜 부르면서 궁중 아녀자의 몸으로 국정에 간여하여 척신들의 전횡(專橫)을 획책하고 굿판을 벌여 왕실의 내탕금을 함부로 사용하는 등 조선왕조를 망하게 한 ‘암탉’ 정도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본 뮤지컬에서도 세자를 얻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명성황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명성황후와 함께 동시대에 조선에 거했던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은 다음과 같이 그녀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여왕보다 기품 높으신 분.
힘과 지성을 아울러 갖추신 여걸.
민완(敏腕)한 책략가이시자 유능한 외교관.
백성의 복지를 찾아 밤잠을 설치시고
나라를 위해서는 한 몸을 던지실 이.
왕비 전하가 계심으로 조선도 지켜지리.”

– 이문열 <여우사냥>

혹자들은 명성황후의 업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들 한다. 이 짧은 공연을 통해 충분히 나타낼 수는 없지만, 언더우드 부인이 언급했듯이 뛰어난 책략과 외교력을 발휘하여 노골적인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맞서 싸웠던 것은 광명의 시대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업적을 남긴 것에 못지 않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극심한 혼돈과 중압감을 견디면서 망국의 아픔을 온 몸으로 떠안은 인물이다.

뮤지컬의 노래는 아니지만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던 ‘나 가거든’의 이 가사만큼 명성황후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도 없을 듯 하다.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삶은 고해다”

명성황후의 삶은 슬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대궐에 들어와서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고, 거의 평생을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맞섰으며, 자식을 무려 네 명이나 잃었고 그나마 하나 남은 아들마저 병약하여 보위를 잇는 것이 불투명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약소국의 서러움을 톡톡히 당하면서 임금을 보좌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슬픔을 견뎌야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슬픔에 체념한 채 주저앉지 않고 지난 반 만년 역사 속 어떤 인물보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냈다. 시아버지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아 국왕에게 돌렸고, 열강의 침략 야욕들을 적당히 활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여 세력 균형을 도모하였다. 청일 전쟁으로 조선은 물론 요동 반도까지 차지하려 드는 일본의 야욕에 대항하여 러시아와 구미 열강을 동원한 삼국간섭을 낳은 외교력의 발휘는 그러한 노력의 백미(白眉)였다.

인생에 닥쳐오는 온갖 슬픔과 고통이 반가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하는 한탄과 자조 속에서 체념한 채 하루하루를 근근히 때우면서 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평강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살아 나갈 것인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만큼 험난한 인생을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그분의 삶은 그토록 험했습니다. 격동에 소요, 소요에 격동. 이 끝도 없는 파도가 그 분께 몰아 닥쳤는데, 그 지친 육신을 마침내 무덤에 누이실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내적인 삶은 유리 바다처럼 잔잔했고, 언제나 거기에는 깊은 평화가 있었습니다.”
– L.B. 카우만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바로 우리 주님의 삶이 그러하셨다. 지친 육신을 쉬실 공간도 갖지 못하시고 말씀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사역을 감당하시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 묻히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삶 속에서 누리는 평강에 대한 탁월한 책이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Leap over a wall·1997)이다.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베들레헴 언덕과 풀밭에서 양을 돌보던 다윗은, 양을 지켜내기 위해 사자와 곰 같은 맹수와의 싸움조차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해 온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자의 포효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평상시 늘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경배해 온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곰의 사나움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기도하고 노래하며, 묵상하고 찬미하는 가운데 형성된 그의 상상력 속에는 양, 곰, 사자를 모두 압도하는 더 크고 강대하며 강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었다.”
–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뛰어난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스캇 펙(Morgan Scott Pack)은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대수롭지 않고 쉬운 것이라 생각하기에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삶은 고해(苦海)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대면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오로지 목숨을 연명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삶으로 살아냈다.”
–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괴로운 인생 길에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만이 고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생명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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