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서 생각하는 ‘기독교의 구원’

예수는 사랑으로써 계급과 신분의 벽을 허물고 ‘이웃공동체’를 이룬다

▲ <설국열차>의 한 장면

영화 <설국열차>는 유달리 질서와 위치를 강조한다. 칸칸마다 각기 다른 계층 또는 계급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인류 종말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원열차로서의 설국열차가 유지되려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며, 각각 자신이 타고 있는 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즐기거나 수행해야 한다. 칸과 칸을 넘어서서는 안 되며, 전체의 유익을 위해 질서와 밸런스가 강조된다. (이것은 오래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신학에 전제되었던 위계질서의 형이상학이 그것이다.)

하지만 꼬리 칸 사람들에게 삶은 지옥이다. 비록 빙하로 뒤덮인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건졌을지는 몰라도 배고픔으로 인해 살육을 일삼고, 급기야는 어린아이들을 잡아먹기까지 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견뎌내야 했다. 앞 칸에서 뒤 칸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구원의 손길이란 배고픔을 달래줄 단백질 덩어리이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이 덩어리의 재료는 바퀴벌레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이다. 끊임없는 통제와 감시 속에서 꼬리 칸 사람들은 혁명을 도모하고 앞 칸으로 전진한다. (어쩌면 세계질서자로서의 신적 통치에 저항하며, 인간의 주체성과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했던 계몽주의 이후의 삶의 역동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계급혁명과 연관해서는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연상할 수 있다.)

<설국열차>는 최후의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지대이다. 하지만 생존이 가능한 이 열차에서 구원이란 그저 목숨을 연명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두지 못한다. 꼬리 칸 사람들의 혁명이 성공하여 앞 칸으로 전진할 때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낯설어 보이는 호사한 삶도 실제로는 생존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국 설국열차에 갇혀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꼬리 칸의 혁명은 현상유지를 위해 교묘하게 유도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질서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선 저항이 결국에는 질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고 탄탄하게 만드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꼬리 칸의 혁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꼬리 칸의 지도자인 커티스가 열차 전체의 지도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설국열차의 유지를 위해서는 윌포드처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비극이다. (마르크스 이후 스탈린과 동물농장에서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꼬리 칸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이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내 준 그 희생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그 역시 설국열차의 현실유지 이데올로기에 실상은 동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슬픈 현실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이데올로기에 순응할 것을 강조하며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 <설국열차>의 한 장면

그렇다면 설국열차는 과연 구원열차인가?

기차의 설계자인 남궁민수는 꼬리 칸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그만이 유일하게 열차 내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로부터의 탈출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벽으로만 생각했으나 사실은 유일하게 밖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통로인 ‘문’을 폭파함으로써 설국열차에서 설국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이 길만이 진정한 구원인 셈이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비극적이다. 북극곰의 생존과 두 아이의 생존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 역시 비극적이다. 두 아이는 후생인류에게 아담과 이브란 말인가? 에덴동산도 아닌 설국에서?

<설국열차>의 순환은 ‘순환적 역사관’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설국열차에서는 순환을 통한 역사의 새로움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위치에 애초부터 부여된 질서가 있고, 그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종적인 숙명론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카스트제도를 긍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인도 사람들이야말로,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욕구로 인해 투쟁을 반복하는 서구인들에 비해 훨씬 평화적이라고 생각했던 간디를 떠올리게 한다. 설국열차와 윌포드의 정신이 현실 순응적 세계관을 대변한다면, 커티스와 꼬리 칸 사람들은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세계관을 대변한다. 하지만 어디에도 진정한 구원은 없어 보인다. 설령 남궁민수처럼 열차를 폭파하고 밖으로 나간다 한들 거기에도 구원은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생존지역인 설국열차를 포함하여 열차에 탑승한 모두가 죽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구원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가? 설국열차를 구원할 수 있는 기독교적 구원관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처음에는 동아줄이 생각났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동아줄 말이다. 피안적 세계로의 탈출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피안으로 탈출할 수 있는 동아줄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였다. 안에서 밖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의 침입. 하나님 나라는 그의 삶을 통해 현재화되고 현실화되었다.

▲ <설국열차>의 한 장면

우리는 그것을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부른다. 이 사랑은 모두를 아무런 조건과 차별 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나도록 만든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계급적, 신분적, 경제적 차별이 해체된다. 꼬리 칸과 앞 칸의 구분이 흐려진다. 이 사랑은 꼬리 칸에서 앞 칸으로 전복을 향해 전진하는 투쟁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 사랑은 앞 칸에서 꼬리 칸으로 향하기도 하고, 칸과 칸 사이에 세워진 철벽을 무너뜨리는 파상적인 힘으로도 작용한다. 예수의 사랑은 꼬리 칸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며, 질서 이데올로기에 굴종하지 않고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하되, 결코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꾀하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사랑일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앞 칸 사람들로 치부할 수도 있는 삭개오나 백부장의 회심을 가능케 했다.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힘입어 원수처럼 여기며 서로를 잃어버린 ‘이웃’과 만난다. 따라서 이웃은 역사적이다. 이웃은 그저 주어진 실체도 아닐뿐더러 질서 속에 가둬진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다. 이웃과의 만남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은 막힌 칸과 칸 사이의 벽, 원수 됨을 허무는 힘으로 작용한다. 길리엄에게 잠시 나타난 자기희생적 사랑이 꼬리 칸에서만 베풀 게 아니라 앞 칸에서도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예수의 사랑은 파상적이다. 꼬리 칸에서만 아니라 앞 칸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에서 파상적이다. 이렇게 될 때 설국열차는 더 이상 순환적 궤도만을 반복하지 않고, 설국열차 자체가 하나의 생동하는 삶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벽을 허무는 사랑이 역사한다면 말이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말한다. 이때 이웃은 정해진 인물이 아니다. 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는 모두가 이웃이다. 원수가 이웃으로 화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처럼. 매순간 이웃은 바뀐다. 매순간 이웃은 얼굴을 내민다. 그곳에서 사랑이 시작될 때 구원은 꽃핀다. 예수께서 말한 구원은 꼬리 칸의 혁명도 아니며, 삶에서의 탈출도 아니다. 삶 한복판에서 막힌 담을 허무는 사랑의 파장일 것이다.

▲ <설국열차>의 한 장면

*필자 박영식(youngsik70@empal.com)은 서울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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