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정신대할머니, 평화박물관 이어 ‘엄마 나라 이야기’로 간다

홍순관 씨의 노래인생에는 몇 번 굵직굵직한 매듭이 드러난다. 대나무 마디 같은 것이다. 그때마다 공연의 맥이 바뀌었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한 번 푯대를 정하면 온 몸을, 모든 시간을 그리 쏟아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오른 ‘엄마나라 이야기’ 공연 계획을 보았을 때 또 하나의 매듭을 지었구나, 싶었다.

최근에 마련한 그의 방을 찾았다. 종각역에서 조계사로 향하는 길목에 아담한 방을 하나 ‘얻었고’ 그 방을 자신의 향기로 가꾸어 금세 그의 방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생각이 온통 10월 29일에 있을 공연 준비로 모아진 듯 툭 터져 나온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15년 넘게 외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정신대 할머니 돕기로 시작했고, 평화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공연을 할 때마다 교포 사회의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한인사회의 예술문화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의 핵심은 ‘언어’였다. 그러니까 외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개콘이나 한국 드라마 같은 것만 보고 나서 한국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그게 다가 아니다, 개콘이나 드라마로 말할 수 없는 뚝심 있는 한국이 있다,

그러면서 동요와 시노래를 통한 엄마나라 이야기를 꺼낸 셈이었다. 동요로는 엄마 나라의 감성을 만날 수 있고, 시노래를 통해서 엄마 나라의 얼과 정신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언어를 만날 것이다. 그 언어는 시인들의 정제된 언어이다. 그러다가 역사와 자연을 보는 시인들의 마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해외에 살면서 엄마 나라의 언어를 모르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살더라도 엄마아빠와 본질적인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거기서 잘 자라서 그 사회의 큰 인물이 되더라도 엄마 나라에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도 다른 나라 언어를 모르면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작은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부가 고민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그의 이야기는 장황하지만 논리가 정연했다. 정신대할머니와 평화박물관에 이어서 이제 그의 공연은 ‘엄마나라 이야기’로 갈 수밖에 없다. 그는 4년 전에 이미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엄마나라 이야기’를 공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니네 나라에도, 니네 엄마나라에도 이런 노래가 있단다’ 하고 대화를 건넨 셈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교포사회의 우리 아이들에게 건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10월 29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하는 공연은 전초전인 셈이다. ‘홍순관이 이런 노래를 한다’는 걸 알리려고 마련한 자리이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평화박물관 곧 ‘춤추는 평화’의 연장선이다.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바뀔 무렵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상실감, 외로움, 절망, 대인기피, 울분…. 그런 모든 어두운 감정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그 무렵 그의 집 가까운 카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전에 본 얼굴이 아니어서 놀랐다. 심지어 그 동안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대선 끝에 온 아픔이 있었고, 또 공연을 함께하며 오랫동안 동지로 지낸 사람을 잃었다. 계획하던 모든 게 허물어졌고, 인생은 참 거품처럼 덧없었다. 그 사이로 분노가 치밀었고,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도피하듯 미국으로 떠났다. 공연 초청을 핑계 삼았다.

올 봄, 그러니까 5월에 뉴욕과 LA에 다녀왔다. 신학생 때 나를 만나서 알고 지내던 친구가 어느새 훌쩍 자라서 이제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 되어서는, 그 교회에 나를 초청했다. 그렇게 사귀어 온 친구들이 몇 되는데, 그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엄마나라 이야기’에 공감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엄마나라 이야기’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한인학교와 한글학교 등을 연결한다는 로드맵도 만들었다. 현재 구두로 초청을 받은 곳이 몇몇 곳 된다. 아무튼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공연할 계획을 세웠다.

좋은 계획이다. 참 잘되면 좋겠다. 하지만 일이란 게 펼쳐지면 곳곳에 장애물이 있게 마련이고 산 넘고 물 건너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러야 비로소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 먼 광장을 바라보는 ‘비전’이야 달콤하겠지만 그 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좋은 사람 만났으면 싶고, 고생 좀 덜했으면 싶다.

홍순관 씨는 편하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H가 지난겨울에 떠나고 나서 사실 나는 멘붕이었다. 무슨 공연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래서 떠난 뉴욕여행이었다. 계획이 순조로우면 올겨울에 음반을 만들고 내년 봄에 미국서부터 공연을 시작할 것이다. 물론 당장은 뭐가 보이는 게 없다. 음반 만들 돈도 없어서, 자비량을 해볼 생각이다. 그게 뭐냐면, 조각전과 서예전을 하려고 한다.

아, 홍순관 씨의 진짜 전공은 조각이었다. 조각을 전공하기 전에는 서양화를 그렸고, 또 그 전에는 서예를 했다. 어느 것 하나 남부럽지 않은 눈이 있다, 고 감각 있는 누군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차라리 미술을 했으면 고생은 덜 했을 텐데, 그런 말도 했다. 아무튼….

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작업을 하기에 이 장소는 안성맞춤이다. 옥상이 훌륭하다. 일을 시작하려면 4000만 원 정도 목돈이 필요한데, 당장은 가진 게 없으니 전시회를 통해서 팬들에게 내 작품을 사주십사, 할 계획이다. 지금 예정된 공연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11월 7일에 있을 WCC 총회 초청공연이다. 이 공연을 마치고 나서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술을 안 한 지도 30년이 지났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나에게는 음악보다 미술이 더 편하다. 아마 어려서부터 이 일을 해 와서 그렇지 싶다.

하려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했다고 여겼는지 홍순관 씨는 CD플레이어를 켰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소리가 오후의 햇살 사이로 스며들었다. 지강유철 씨가 선물한 장비라고 자랑했다. 스피커 옆으로 벼루와 붓이 든 궤가 보였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물건들이 그의 지난 세월을 앨범처럼 보여주었다.

음악이 조금 흐른 뒤 이제는 오래 된 이야기를 꺼내듯 말했다.

벌써 나이가 쉰 하고도 셋이다. ‘53’이라는 나이, 내게는 고비라는 느낌이 든다. 태춘이 형(가수 정태춘)과 7년 정도 교제했는데, 그가 노래를 안 하는 이유를 이제 슬며시 알 것 같다. 아마도 이 나이는 남자들이 갈등에 빠지는 나이 같다. 내 노래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내가 노래를 전보다 더 잘하는가? 물론 개인적인 갈등인데, 이런 갈등이 격하게 몰려오는 나이 같다. 물론 태춘이 형과 달리 나는 교회를 다니고, 한 생명이 천하이고, 온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니까, 한 사람이 위로 받고 그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노래를 해왔겠지만….

하지만 세상은 안 바뀌고, 내 노래를 듣는 사람도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다. 27년이라는 세월을 노래하면서 살았는데, 팬이 만 명도 안 된다. 음반을 만 장도 못 팔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참혹하다. 교회는 커졌다고 하는데, 게다가 교회는 음악을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이쪽(기독교계)에서 가수가 몇 명이나 될까? 정말 안타까운 건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저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건 음악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회의 격조 문제이기도 하다.

20년 전에 부른 노래를 요즘 들어서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했다. 그 말은 그와 청중 사이의 거리가 20년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새 음반을 내려고 마음을 먹고서도 ‘이 노래는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알아줄까?’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그는 새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새로 태어나고, 자라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메시지 앞에서 생소해 하였고, 그 거리를 열정과 꿈 상상력으로 헤쳐 나왔다. 그런데 이제 주눅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이 둘이 모두 대학생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 느끼지 못한 걸 이제는 느낀다. 인생 전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그들의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지만 지켜봐야 한다. 내 새끼니까. 그러다 보니 내 일에 욕심을 부리는 게 주저된다. 전시회도 하고 싶고, 영화도 만들어 영화제에 출품하고도 싶다.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땅에서 홍순관이란 가수는 이렇게 노래인생을 살았구나, 그걸 다큐로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바닥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너희들이 얼마나 미국 노래에 젖어 있고, 이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는지, 역사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정말이지 보여주고 싶다.

CCM과 경배와찬양의 바람이 불 때 그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마녀사냥을 하듯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그렇게 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시간을 보냈다. 왜 우리 노래를 뒷받침 할 신학이 없을까, 고민했으나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일찍 선각자처럼 누군가 그 길을 갔다면 우리의 노래문화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몇 년 전 ‘쌀 한 톨의 무게’를 듣고 오재식 선생이 “이게 기독교의 노래이다”라고 말했을 때 힘을 얻어서 ‘노래신학’을 쓰기로 했다. 이제 누군가가 신학적인 도움을 준다면 책으로도 펴낼 수 있을 만큼 만들었다. 여전히 할 일 많은 사람이다, 그는….

달력에는 공연 스케줄보다 강연 스케줄이 많다. 노래하는 사람이 강연 스케줄이 많은 건 뭔가 톡톡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노래로 말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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