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시원(始原)을 같이한 유서 깊은 교회

겨자씨 2020. 봄(Vol40) – 아름다운 교회로의 여행

김포중앙교회
한국 교회의 시원(始原)을 같이한 유서 깊은 교회

글 · 김용기 / 사진제공 · 김포중앙교회

김포중앙교회의 전신 김포읍교회

김포중앙교회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와 같은 시기에 설립된 유서 깊은 초대 교회이다. 교회사에 의하면 서울과 경기 지역의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시기는 대략 1904년 전후로 파악된다. 북한 지역은 정치와 경제에서 조금 소외되어 새로운 문물인 기독교의 전파가 빨랐으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서울, 경기는 그만큼 보수적인 문화가 강해 기독교의 전파가 더뎠다.

올해로 126년의 선교 역사를 간직한 김포중앙교회 전경. 2004년 110주년 기념 교회를 헌당했다

1894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된 김포중앙교회의 전신인 김포읍교회는 이런 시대적·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지역 사회에 빠르게 신앙의 뿌리를 내려 서울과 경기를 대표하는 지역 교회로 성장했다. 김포읍교회는 설립 1년 만에 33평 규모의 16간 예배당을 건립하고, 1912년에는 신자가 300명이 넘었다.

1962년 김포읍교회에서 분립한 후 1972년 건립한 김포중앙교회 모습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 받은 언더우드 목사는 김포읍교회 초대 당회장을 지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지 기증으로 교회 신축

김포읍교회의 성장의 배경에는 헌신적인 선교를 펼쳤던 전도자와 선교사들이 있다. 새문안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의 파송으로 김포 지역에 들어온 이춘경의 전도로 김포 지역에 미조직 교회가 형성됐다. 이후 인근 고양군 세교교회에서 고군보와 부인 박살라미가 전도에 합세하며 지역 교인들이 점차 늘었다.

선교 결과에 고무된 언더우드 선교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김포군 북변동 대지 3,500평을 기증했다. 그에 발맞춰 성도들은 700원의 헌금을 모아 예배당 33평, 목사관 15평, 교육관 12평 등 넓은 교회를 새로 지어 지역 선교에 나섰다.

한국인 목사가 없었던 시기 초대 김포읍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과 김포를 오가며 전도에 열을 올렸다. 수적인 성장세를 보였으나 장로가 없어 미조직 교회로 있던 김포읍교회는 1912년 이춘경을 초대 장로로 장립하고 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 경기 서쪽 지방의 교회는 37개 정도로 이 가운데 장로가 있는 교회는 단 두 개의 교회에 불과했다.

교회의 조직이 성립하면서 교회의 운영과 치리가 안정되며 성장도 두드러졌다. 1915년 노회록 총계표에 따르면 김포읍교회의 신자 수는 1915년 299명, 1916년에는 3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서울의 새문안교회의 교인 숫자도 300명 규모였던 것을 보면 김포 지역의 기독교 전파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김포읍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
1962년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를 마친 후 김포읍교회 교인들이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민주적 선거제로 임기제 직분자 선출

이 같은 김포 지역의 빠른 복음 전파에는 현대의 교회에서도 쉽게 채택하기 어려운 민주적 선거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 교회를 섬기는 장로, 집사, 조사, 권찰과 같은 직분자를 모두 선거를 통해 뽑았다. 특히 장로를 제외하고는 1~4년 활동을 하고 임기를 마치면 다시 투표를 실시해 선출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참여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선거라는 민주적인 절차가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또한 교회 입교자들에 대해 엄격한 입교 과정을 두어 아무나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이를 테면 세례 문답에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여전히 학습 과정에 남아 있도록 해 기독교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을 갖추도록 했다.

교회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책벌(責罰)과 해벌(解罰)의 기준을 정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음주나 이혼, 첩을 들이거나 아내를 버린 일, 주일을 지키지 않은 일, 병에 걸려 소경을 청하여 독경(讀經) 하는 일, 우상 숭배, 제사 등이 발견되면 교회의 제제를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한 번에 30명이 넘는 많은 신자가 책벌을 받아 제명되거나 출교를 당하기도 해 교회가 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만한 높은 수준의 도덕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빠른 성장을 보이던 김포읍교회는 당회장 언더우드 목사의 귀국과 연이은 서거로 교회 성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 뿐만 아니라 경기 서쪽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와 당회장 임무를 맡았던 언더우드 목사는 1916년 병으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 후 그해 10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잠긴 김포읍교회는 언더우드 목사의 뒤를 이어 교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불투명한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면서 교인이 줄어드는 등 성장이 지체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집요한 교회 탄압과 한국 전쟁도 교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경기 서북부 지역의 어머니 교회 역할을 해 온 김포읍교회는 1962년 통합과 합동 교파로 나뉘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김포중앙교회와 김포제일교회로 분립돼 지역 복음화의 양대 축으로 성장했다. 올해로 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김포중앙교회는 지역 주민을 위한 아버지·어머니 학교, 노인 학교를 운영하고 중국 등 해외 선교에도 적극 나서며 선교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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