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겨자씨 2020. 봄(Vol40) – 2020 특별기획 한반도에 핀 순교의 꽃② 손양원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그는 위대한 경건의 사람이요, 전도자였고, 신앙의 용사요, 나환자의 친구요, 원수를 사랑한 자요, 순교자요, 성자이다. 그의 일생은 기도로 호흡삼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아 영적 만족과 감사, 충만함으로 찬송을 끊지 않은 희세의 경건인이었다.”
– 박형룡 박사의 추모사 중 일부(1950년 10월 29일) –
‘내게 맡긴 양을 위해 나의 겨레 평화 위해 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글/사진 · 최경진 목사(칠원교회)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제1부 주님께 부름 받기까지(1902-1925년)

손양원 목사의 부모님인 손종일 장로와 김은수 집사

1902년 6월 3일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의 장남으로 태어난 손양원 목사는 1909년 아버지를 따라 경남 함안에 있는 칠원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1914년에 학습을 받고, 1917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칠원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맹호은(F.J.L.Mcrae)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하게 됩니다.
졸업 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친인 손종일 장로가 3․1운동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르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후 학업을 계속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1923년에 귀국합니다.

손양원 목사 부친 손종일 장로 회갑 때 찍은 가족사진(1931년 12월29일)

제2부 신학교 시절(1926-1938년)

1926년 3월,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한 손양원 목사는 부산 감만동 상애원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졸업 후 경남 지역의 여러 교회를 섬기다가 1935년(33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시무 하면서 학문과 복음 전도에 진력합니다.

손양원 목사의 전도사 시절, 평양 신학교 재학 시(1937년 2월 27일)
평양신학교 33회 졸업생 및 교수(동그라미가 손양원 목사)

제3부 한센인의 영원한 벗(1939-1950년)

평양신학교 2학년이었던 1937년, 애양원교회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이 되어 1939년 7월 1일 여수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여 한센인들의 목자가 됩니다. 부임 후 애양원 직원들의 좌석과 환우들의 좌석 사이에 있던 분리막을 제거하고, 중환자들이 있는 14호실에 거침없이 출입하였으며, 심지어는 나환자들 환부의 피고름까지도 빨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기도문은 나환자들을 향한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만약 저들과 같이 된다면 이들과 함께 기뻐하며 일생을 같이 넘기려 하오니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사 어루만지심 같이 내가 참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백범 김구 선생과 손양원 목사
강연 후 김구 선생과 함께

제4부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1940-1945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손양원 목사는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됩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가 “덴꼬(전향, 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자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신앙, 信仰)가 문제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그로 인해 해방이 될 때까지 옥중생활을 하게 되는데,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불리며 많은 사람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제5부 원수 사랑과 순교(1948-1950년)

1948년 10월에 여순 사건이 발발하고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좌익 세력에 의해 순교합니다. 천붕(天崩)의 슬픔 속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을 삼음으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게 됩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몸을 피하라는 교우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8일 순교하고 맙니다. 죽는 순간에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알려집니다.

손양원 목사의 아홉 가지 감사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애양원교회 이사 후 손양원 목사와 가족(1939년 7월 14일)
애양원교회 당회원들(1948년 6월 12일)
두 아들 손동인, 동신 형제의 장례식 장면.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앞세우고 ‘영광일세, 영광일세’ 찬송을 부르면서 성도들과 함께 운구했다
손양원 목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가족들
손양원 목사 순교 전 최후 사진. 찬양대원들과 함께(1950년 3월 13일)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 건립된 생가와 기념관(2015년 10월 개관)
전남 여수 손양원기념관
최경진 목사(칠원교회)

더 많은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