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예술가들, 그 흔적을 따라 서촌을 걷다

겨자씨 2020. 봄(Vol40) 여행, 스토리를 담다

서촌의 예술가들, 그 흔적을 따라 서촌을 걷다
삶을 돌아보는 사색의 공간

경복궁의 서쪽 마을 서촌. 조선시대 역관, 의관, 율관 등의 중인 계급이 살았던 서촌. 사대부들의 거주지였던 북촌의 한옥이 귀품과 화려함을 품었다면 서촌의 한옥은 규모가 작고 질박하다.
유명 갤러리와 카페가 즐비한 북촌은 여행지로 유명세를 탄 지 오래다. 서촌은 한참 늦었다. 하지만 이젠 서촌이다. 서촌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서촌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서촌 도보 여행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시간이기도 하다.

글/사진 · 전영의

처마가 맞닿을 듯 오밀조밀 붙어 있는 서촌한옥마을. 서로의 숨결에 기대어 살았을 중인들의 삶의 이야기가 골목골목 펼쳐져 있다

이젠, 서촌!

신청했던 서촌도보해설관광 프로그램이 코로나19로 취소돼 홀로 서촌을 찾았다.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광화문에서 서촌한옥마을로 건너가는 길목에는 한국 전통문화 체험 중인 한복 차림의 외국인 관광객들만이 드문드문하다. 서촌한옥마을과 통인시장도 제법 한산하다.
부득이하게 거리로 나온 사람들도 대부분 마스크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경계했다. 길을 모른다고 길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서울한옥포털에서 출력한 서촌 도보 코스 안내지만을 의지하여 서촌을 여행했다. 그러다보니 꼭 봐야 할 곳을 못 찾아 빠트리기도 하고, 엉뚱한 곳을 몇 번이고 맴돌기도 했다. 못 본 곳은 여백이 되었다. 서촌의 여백. 그 여백 때문에 서촌을 또 찾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의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은 보통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청운동, 신교동, 체부동 일대를 말하는데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나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이상, 윤동주, 노천명,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같은 문인, 화가들이 삶을 일군 곳. 그래서 문화 예술의 꽃이 융성하게 피었던 곳! 그 향기를 찾아 서촌의 시간과 공간속을 걷는다. 혼자 걷고 쉬어가기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이상의 집’ 내부. 많지는 않지만 이상을 추억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차도 한 잔 할 수 있다
서촌과 70여 년을 함께 한 통인시장. 엽전을 구입하여 원하는 음식을 도시락에 담는 엽전 도시락이 유명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도시락에 다양한 음식을 담고 있다

서촌을 빛나게 하는 서촌의 예술가들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을 지나자 곧 통의동의 명소 ‘보안여관’이 나왔다. 보안여관은 단순한 여관이 아니다. 시인 서정주의 오랜 하숙집이었고, 소설가 김동리의 단골 거처였고, 지방에서 상경한 문인들이 짐을 풀고 글을 쓰던 문학의 산실이었다. 1934년부터 2004년까지 여관 영업을 한 보안여관은 지금은 전시회와 음악회를 여는 문화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겸재 정선이 노닐고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통의동. 이상의 시 ‘오감도’에 등장하는 ‘막다른 골목’ 또한 통의동의 한 골목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안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재 시인 이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상의 집’이 있다. 큰아버지에게 입양된 이상이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던 이상의 집에는 이상을 기억할 수 있는 도서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상의 집에서 5분 거리,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다. ‘대오서점’이다. 주인 부부의 이름 ‘조대식’, ‘권오남’에서 한 글자씩 딴 대오서점. 69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부부의 책방에서 이제 부부는 만날 수 없다. 상호도 온전하지 않다. ‘서점’이란 글자는 세월에 뜯겨져 나가고 간신히 붙어있는 두 글자 ‘대오’도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펄럭인다.
대오서점에서는 더 이상 책을 팔지 않는다. 헌책방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는 카페로 변신했다. 카페 내부도 차를 마실 수 있는 몇 개의 테이블을 들여놓은 것을 빼면 여전히 헌책방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옛날 교과서, 잡지, 시집, 소설책, 전집 등이 사방에서 추억을 소환한다. 붙잡고 싶고, 기대고 싶은 시간들을 가득 품고 있는 공간이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 재킷 촬영을 해 젊은 세대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 대오서점은 추억 여행을 할 수 있는 서촌의 핫플레이스이다.

조선 시대 중인들이 살았던 한옥을 재현해 놓은 상촌재의 별관에서는 ‘한글 손글씨 체험’을 할 수 있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69년 전통의 헌책방 대오서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외관은 헌책방이지만 내부는 카페다. 이따금 전시회와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처럼

수성! 물 수, 소리 성. 물소리가 아름다운 수성동 계곡.
이곳에 안평대군의 별장 ‘비해당’이 있었다.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수성동 계곡을 관통하여 청계천으로 뻗어나갔다. 때문에 수성동 계곡은 사시사철 맑고 시원한 물소리를 냈다. 그런 연유였을까? 비해당에는 당대 이름 있는 문인과 집현전 학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안평대군은 그들과 더불어 수성동 계곡을 유희했다. 청량한 물소리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고, 계곡물에 비친 달빛에 젖어 가야금을 켜곤 했다고 한다. 겸재 정선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인왕제색도’에 담았을 만큼 수성동 계곡은 많은 예술가에게 비경으로 꼽혔다.
수성동 계곡에서 조금 내려오면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터와 박노수미술관이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상범 가옥과 노천명 집터는 끝내 찾지 못했다.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서촌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주옥같은 시와 그림과 예술가들의 심미안적 삶이 말을 걸어오는 매력적인 서촌. 속을 들여다볼수록 아름답고 그윽하다.
나는 언제쯤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처럼 맑고 푸른 소리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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