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2020 특별기획 한반도에 핀 순교의 꽃 ① 주기철

주님의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
주기철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글 오성한 목사(웅천교회)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가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설교 ‘고난의 명상’ –

평양산정현교회 제직원 일동(1937). 아래 좌측부터 조만식 장로, 김동원 장로, 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 유계준 장로, 김봉순 장로, 오윤선 장로, 김찬두 장로
웅천교회 부흥회

제1부 1897-1910(1-13세) 복음을 받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에 있는 웅천교회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웅천교회는 1900년도에 세워진 역사 깊은 교회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웅천교회보다 3년 빠른 1897년 11월 25일, 아버지 주현성과 어머니 조재선의 4남 3녀 가운데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막내 주광조 장로 어렸을 때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13세였던 1910년, 맏형 주기원을 따라 성탄절에 교회를 갔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길선주, 김익두, 손양원 목사 등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흐르는 분들과 함께 한국 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제2부 1910-1916(13-20세) 개명

앞서 말했듯이 주기철 목사가 처음으로 웅천교회에 출석한 것은 13세 되던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은 지 2년경이 되었을 때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기복이었는데 기철로 바꾼 것입니다. 불교와 유교 문화 속에서 예수를 믿고 보니 예수님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이름을 바꾸면서 그는 다짐했습니다. 주님을 철저히 믿겠다고 말입니다. 개명한 이름인 ‘주기철’의 의미는 ‘주님의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그 이름을 평생 사용했고, 사랑했습니다. 또 이름처럼 살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1913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해 1916년 3월에 오산학교 7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대학(現 연세대)에 입학합니다.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선생을 만나 배우게 되었고, 상과에 입학한 것은 사업가였던 이승훈 교장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주역이 된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제직들
주기철 목사 웅천교회 시무 – 경남노회 종교교육지도자 하기 수양회(1930)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원 묘지의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집사 묘소
출옥 후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 출옥 교인들(1945. 8. 17.)
평양신학교

제3부 1926-1936(30-40세) 사역의 중심

주기철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하여 목사가 된 그는 1926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부산초량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35세의 나이로 1931년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의 사역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아이들에게 바른 복음을 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산 삼일교회서의 사역 중 놀라운 사역은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삼일유치원을 설립해 1931년 3월에 제1회 유치원생 10명을 배출한 것입니다.

동년 7월에 마산문창교회로 부임한 그는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쏟았습니다. 당시 교회당이 멀고 교통편이 좋지 못해 교회당까지 오기 힘든 아이들을 위해 마산 시내 열 군데를 정하여 가정 주일 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참으로 획기적일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어린이에게 예수 복음을 심어 일제 치하의 조국을 건져 세계 속에 우뚝 솟게 하리라는 큰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 장례식
주기철 목사의 첫 교회인 웅천교회 내의 주기철목사기념관. 주기철 목사의 사역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제4부 1936-1944(40-48세) 순교

주기철 목사는 일본의 천황을 섬기고 절하는 목사를 향해 “당신도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는 무서웠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옥고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물고문, 불고문, 주리 틀기, 잠 안 재우기, 밥 굶기기, 거꾸로 매달기, 열 손톱 밑에 이쑤시개 꼽기 등 말할 수 없는 고문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다섯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27일, 1개월, 6개월, 9개월간 각각 수감 생활을 했고, 다섯 번째 옥고 약 4년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1940년 6월에 구속된 그는 1944년 4월 21일 해방을 1년여 앞두고 순교했습니다.

3차 구속되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면서 있었던 이야기는 온 천하를 울게 했습니다. 그는 3일만이라도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선처하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풀려난 지 3일 되던 1939년 2월 주일에 ‘오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설교로 일본 순사마저 울렸다고 합니다.

설교 후 젊은 청년들이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이 설교 때문에 또 잡혀가실 텐데 설교 원고를 저희에게 주십시오.”라는 요청에 “안 된다. 저놈들이 나의 설교 원고를 달라고 할 텐데 너희들이 다치면 안 돼. 어서 베껴 적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목사님의 원고그대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전문을 소개합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 오종목의 나의 기원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오며 나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2.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년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1)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3)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4)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 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목숨이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1939년 2월 평양산정현교회에서 설교

글 : 오성한 목사(웅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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