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도 모양도 다르지만 제 몫의 불빛을 들고

여행, 스토리를 담다

회색빛이 매혹적인 부다페스트
크기도 모양도 다르지만 제 몫의 불빛을 들고

아시아인들은 헝가리에서 유럽을 보고, 유럽인들은 헝가리에서 아시아를 본다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이 공존하고 있는 부다페스트. ‘다뉴브의 진주’, ‘동유럽의 파리’로 불리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파리, 프라하와 함께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힌다. 알프스 낮은 산자락에서 발원한 다뉴브 강이 아홉 개국을 적시며 2,850km를 흘러 흑해로 뻗어나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게 닿고 있는 부다페스트를 만난다.

글·사진 전영의

다뉴브 강 어부들의 충정이 깃든 ‘어부의 요새’. 부다와 페스트 두 도시를 가르는 다뉴브 강과 강물 위에서 두 도시를 잇는 세체니 다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물의 도시, 부다페스트

다뉴브의 물길이 닿는 아홉 개국 중 가장 아름다워 ‘다뉴브의 진주’로 꼽히는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에 서면 왜 이 도시가 다뉴브의 진주라 불리는지 금방 실감할 수 있다.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천년 역사를 품은 주물들이 그 뜨거웠던 시절의 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흐르는 다뉴브 강을 굽어보고 있다. 강물과 어우러진 도시의 빛이 오묘하다.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도시 부다와 페스트. 언덕에 위치한 부다 지역에는 왕과 귀족이 살았고, 페스트는 서민들의 땅이었다. ‘물’을 뜻하는 부다와 ‘도시’를 뜻하는 페스트가 합병한 것은 1872년, 두 도시는 다뉴브 강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했다.

프랑스 파리, 체코 프라하의 야경과 함께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히는 부다페스트의 야경. 밤이 되자 다뉴브 강변의 크고 작은 건축물들은 일제히 형형색색의 불빛을 들어올렸다. 그중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는 곳은 365개의 첨탑을 가진 헝가리 국회의사당.

365개의 첨탑과 웅장한 몸통에서 쏟아진 황금빛 조명은 국회의사당 외벽을 물들이며 물결치듯 유려한 선율로 미끄러져 강물 수면을 적시고 물속으로 하강한다. 물속에서도 빛의 파도가 인다.
크기도 높이도 다 다르지만 모두들 제 몫의 불빛을 들었다. 빛이 어둠을 사른다. 빛에 물든 도시의 얼굴이 곱다. 이럴 때 나도 꺼내 들 불빛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부의 요새’ 안쪽 광장에 위치한 마차시 성당. 가톨릭과 이슬람 양식이 혼재된 건축 양식에서 순탄하지 않았던 이곳의 역사가 보인다

어부의 요새

부다 언덕에 자리한 ‘어부의 요새’. 이곳이 요새라니. 요새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누구도 이곳을 요새라고 생각하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하얀 색으로 건축된 요새는 마치 중세 귀족의 성처럼 화려하고 고고하다. 요새 안쪽에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마차시 성당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가톨릭과 이슬람이 혼재된 건축 양식에서 이곳의 역사가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은 19세기에 붙여졌다.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다뉴브 강의 어부들이 온몸으로 막아 이곳을 지킨 데서 비롯됐다. 어부의 요새, 이 언덕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한다. 발아래 부다페스트를 시원하게 펼쳐놓았다. 다뉴브 강물 위에서 부다와 페스트를 잇고 있는 세체니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리 위를 걷고 있는 여행객들의 설렘이 이 언덕에서도 느껴진다.

세체니 다리 양쪽 초입에 네 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중 한 사자상의 입속에 혀가 없는 것을 다리 개통식 날 한 시민이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와 우리나라 TV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이기도 한 세체니 다리. KAL기 폭파 전 김현희가 이 다리위에서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갈등했다고도 한다.

밤이면 365개의 첨탑에서 황금색 불빛을 쏟아내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세계 3대 야경에 꼽히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군왕의 와인, 황소의 피

헝가리 하면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 토카이 와인과 ‘황소의 피’라는 별칭을 가진 에그리 비카베르. 두 와인은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다.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토카이 지방의 농부들이 수확 시기를 놓쳐 곰팡이가 핀 포도를 짠 것이 토카이 와인의 시초이다. 옅은 황금색을 띠는 이 와인을 가리켜 프랑스 루이 15세는 ‘군왕의 와인, 와인의 군왕’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디저트 와인’이라고 할 만큼 부드럽고 달달하다.

레드 와인인 에그리 비카베르 또한 오스만튀르크와 관련이 있다. 오스만튀르크에게 전세가 밀리자 에게르 지방의 성주는 자신의 술 저장고를 열어 좋은 술과 음식으로 에게르 병사들을 대접했다. 튀르크 군은 에게르 병사들의 턱수염과 옷에 묻은 붉은 와인 자국을 보며 황소의 피를 마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겁을 먹고 퇴각했다고 한다. 그 후 에그리 비카베르 와인은 ‘황소의 피’로 불리었다. ‘황소의 피’라는 섬뜩한 별칭과는 상반되게 부드러운 타닌감이 오래도록 입안을 맴돈다.

동유럽은 여행 내내 흐린 하늘만 내놓았다. 도시가 주는 빛을 가장 빛나는 컬러로 담지 못해 애가 탔다. 하지만 회색빛에 쌓인 부다페스트는 어떤 컬러를 입은 도시보다도 매혹적이었다. 회색빛에 고인 매력을 부다페스트에서 알았다. 부다페스트를 생각하면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던 어부의 요새와 요새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의 회색빛 선율이 다뉴브 강물과 함께 물결쳐 온다.

유럽 최초로 지하철을 건설한 나라는 영국이지만 유럽 대륙 최초로 지하철을 만든 나라는 헝가리다. 지금도 운행이 활발한 유럽 대륙의 첫번째 지하철 부다페스트 M1라인

수많은 생명을 품고 대장정을 펼치는 다뉴브 강물처럼 깊고 넓게 치열할 수는 없을까?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과 만날 시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폴란드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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