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 평양 산정현교회

아름다운 교회로의 여행

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 평양 산정현교회

글 김용기 / 사진 서울 산정현교회 제공

서울 산정현교회 예배 모습

고난 속에서 피어난 정금 같은 교회

평양 산정현교회의 역사는 곧 한국 개신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1866년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선교사의 기념 교회로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1894년)에서 분립된 형제 교회이다. 1900년대 초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평양 지역 곳곳에 교회가 들어서며 1906년 산정현교회도 설립됐다.

노도와 같은 부흥의 역사 속에 세워진 산정현교회지만 한국 역사의 질곡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찬탈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통과 상실감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살펴야 했다. 방향성을 상실한 채 술과 노름으로 타락해 가는 백성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일에도 앞장섰다.

산정현교회의 장로였던 오윤선과 고당 조만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3․1만세운동을 이끌어 민족정신을 되살렸다. 숭인·숭덕·숭현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시작된 ‘토속품 소비운동’도 산정현교회에서 출발했다.

산정현교회의 모교회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1937년 1월 평양 산정현교회 제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초의 국산품 애용 운동 ‘물산장려운동’ 전개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서 살아남고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고당 조만식 선생이 주창했다. 1920년 산정현교회 장로였던 조만식 선생(1882-1950)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서 시작된 토속품 소비 운동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으며 ‘물산 장려 운동’으로 확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품 애용 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은 외국산 특히 일본산을 사용하지 말고 우리 땅에서 생산하는 물품을 쓰자는 운동이다. 전국으로 퍼진 국산품 애용 운동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있었다.

그 첫째는 의복에 있어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 소금, 과일, 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국산품을 사용한다. 셋째, 일상 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사용하되, 부득이 외국 상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실용품을 구매해 가급적 절약을 생활화한다는 것 등이다.

국산 실용품 사용으로 출발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금연과 금주 운동, 공창 폐지 운동 등 건전한 생활습관과 사회 정화 운동으로 범위를 넓히며 실질적 애국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초기 평양 산정현교회의 모습. 장대현교회에서 평양에 4번째 분립한 교회로 제4교회로 알려졌다. 그러다 산정현에 교회가 건립되면서 산정현교회로 불렸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교인들이 한국 전쟁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와 세운 서울 산정현교회. 서울에는 세 곳의 산정현교회가 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믿음 지켜

백성들의 항일 운동이 거세지며 1930년대, 그 중심에 있었던 교회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도 극심해졌다. 가장 큰 사건이 교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든 신사참배 강요였다. 말을 듣지 않는 교회에 대해 경찰력을 동원해 교회와 학교를 폐쇄하자 1939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며 일제에 굴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주기철 목사(1897~1944)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선도했다. 일제는 눈엣가시와 같았던 주 목사를 다섯 차례나 투옥시키고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지만 끝내 신사참배를 받아낼 수 없었다.

주기철 목사는 수감 기간 동안 못이 박힌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걷는 등 가혹한 고문을 여러 차례 받아 그 후유증으로 1944년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는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산정현교회 순교 정신 전국으로 확산

주기철 목사의 순교로 지켜 냈던 산정현교회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소련의 신탁통치가 시작되면서 교회의 박해는 더욱 혹독해졌다.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세력에 맞서 교회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킨 백인숙 전도사(1917-1950)와 같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제단에 뿌려졌다.

결국 교회를 인민군의 주둔지로 빼앗긴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박해와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에 산정현교회를 세웠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서울 회현동, 후암동, 서초동에 산정현교회를 세워 순교 정신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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