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감리교 최초의 여자 선교사 한국 땅에 떨어진 한 송이 꽃, 수많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다. “조제핀 이튼 필 캠벨”

2019 여름 특별기획 한국에 온 여성 선교사

조선을 사랑한 감리교 최초의 여자 선교사
한국 땅에 떨어진 한 송이 꽃, 수많은 꽃으로 다시 피어나다

조제핀 이튼 필 캠벨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

글 전병식(배화여자대학교 원목)

캠벨 선교사에 대한 전기 A. E. Prince.의 『Planting the Gospel in Korea Story of Josephine Peel Campbell』 표지

캠벨의 출생과 선교사 지원

캠벨은 1853년 미국 남부 텍사스의 웨이코(Waco)에서 출생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두 개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고 텍사스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아버지 역시 텍사스 연회 소속 목사였습니다. 1878년 캠벨은 조지아 주 출신의 캠벨(A. M. Campbell) 목사와 결혼했습니다. 5년의 행복한 결혼생활 동안 두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둘째인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고, 남편 캠벨 목사 역시 쇠약해져 얼마 후 그 뒤를 따랐습니다. 2년 후 첫째 딸 루이스도 성홍열에 걸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3년여 짧은 시간 동안 캠벨은 가족 모두를 잃는 어둠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캠벨은 고통을 통해서 슬픔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니, 자신을 향한 비탄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눈을 돌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기록은 캠벨을 힘들게 했던 상실의 경험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녀자 교육의 개척자를 일흠」에서는 이 모든 일을 겪은 캠벨이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기술한 「한국 선교의 개척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뒤, 캠벨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빈손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 1년 이내에, 그녀는 중국 선교사가 되었다.

캠벨은 자신이 기도해왔던 대로, 더 많은 헌신을 할 수 있는 곳인 중국으로의 선교 요청이 오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캠벨은 1년여의 시간 동안 간호사 교육을 완료하고,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자격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87년 봄에 중국 선교사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06년 배화학당 학생들의 모습. 윗줄 맨 오른쪽이 캠벨 선교사다
1901년에 세워진 배화학당 루이스워커 예배당

캠벨의 중국 선교

캠벨의 생애를 조명해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해냈다는 점입니다. 선교 초기에 선교지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이 다양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이는 캠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 선교지를 도우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캠벨이 1887년 4월 상해에 도착하여 1897년 10월 한국으로 파송되기까지 10년여간 수행한 역할들은 상해 여학교 음악교사, 상해와 쑤저우 여선교회 본부의 사역 관리, 쑤저우 여성병원의 수간호사(총 책임자), 쑤저우 매일학교 운영, 램버드학교(간호학교) 교장, 요한복음 번역(쑤저우 방언으로), 여성 전도 사역 등 다양합니다.

1910년 배화학당 고등과 첫 졸업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서 있는 이가 캠벨 선교사다
1918년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 졸업 사진. 당시 기숙사 사감이었던 캠벨 선교사가 십자가와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교포를 들고 중앙에 앉아있다

‘배화’의 문을 열다

1897년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는 중국에서 10년여 동안 경험을 쌓은 캠벨을 한국 여선교회 사역의 개척자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캠벨은 중국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주저함 없이 즉각적으로 요청에 응했습니다. 캠벨은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교육 사역(배화 학당, 매일학교, 야학 등), 교회 사역(전도부인 양성 및 활동, 주일학교 운영 등), 의료 사역(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캠벨은 처음 한국에 들어와 남 감리회 본부가 있던 남송현에서 사역을 시작한 후 1년 뒤에 장흥고 앞 새로운 선교부지인 자골로 이전해 새로운 선교 사업을 열어 갔습니다. 자골에서 정식 학교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매일학교를 시작하고 있었던 캠벨은 6명의 학생들과 함께 캐롤라이나학당(이후 배화학당)의 문을 열었습니다.

학당의 초기에는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근대적 학교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후 조금씩 발전해 낮은 계층으로는 보이지 않는 근대적인 기독교 여성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종교교회의 모태 자골교회

그리고 남송현의 남 감리회 선교부의 사역이 침체되면서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부터 캐롤라이나학당의 기숙사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골교회의 시작입니다. 자골교회는 캠벨의 영향력으로 양성된 전도부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계속 증가하는 교인들을 기존의 예배당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예배당이 여성 선교 구역 안에 있던 관계로 남성들의 접근성이 저하되는 등 자골교회로서는 독자적인 예배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종침교 부근의 도렴동으로 예배 장소를 이전했습니다.

1910년 6월 도렴동에 마련된 새 벽돌 예배당을 종교교회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배화학당 미술 시간

양화진에 묻히다

캠벨은 1910년 배화학당의 교장을 다른 이에게 맡기면서 서울의 다른 지역의 여성 사역에 참여했는데, 특히 수표교교회와 광희문교회의 전도부인 사역을 맡았습니다. 1918년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캠벨은 끊임없이 한국을 위한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안식년 휴가를 떠났을 때에도 한국 선교에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후원자를 모으고,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상황 속에 놓인 한국 여성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산업기술(양봉업, 양계업, 낙농업)을 배워 전수해 주고자 했습니다.

한 번도 환자 목록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캠벨이었지만, 1918년 발목 부상에 이어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심장이 약해지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먼 여행을 하기에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캠벨은 한국에 더 헌신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1920년 8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오려는 발걸음을 주변의 모두가 만류했을 때, 캠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캠벨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넉 달 만인 1920년 11월 12일 별세하여 15일에 양화진 서양인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이처럼 캠벨의 삶은 선교지와 선교지의 사람들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이 같은 캠벨의 생애는 한국 교회의 귀중한 선교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Letter to Mrs. Mcgavok 1(캠벨 선교사가 당시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서기였던 맥개복 여사에게 쓴 편지)
배화여자대학교 교정의 캠벨 동상
캠벨 선교사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기록되었다
글 . 전병식(배화여자대학교 원목)

<출처  거룩한빛광성교회 겨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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