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은숙(수필가, 필명 김지형)

 

거기 비탈진 마을 입구에 뽕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 짙은 초록 잎 사이사이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까만 열매, 그것은 분명 오디였다. 실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오디나무를 그렇게 가까이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어릴 적 한때, 그토록 나를 감질나게 했던, 그러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오디나무가 그곳에 나 보라는 듯 의연히 서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오랜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에 나무 밑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때 맞춰서 오디가 잘 익었습니다.”
나무 옆에서 K선생이 미소 섞인 인사를 했다.

싱그러운 햇살이 더욱 따가워지는 초하의 날씨 때문일까! 모처럼의 휴강 시간에 야외 나들이를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에 회원 거의가 흔쾌히 찬성을 하였다.

우리가 간 곳은 회원 중 친환경 운동가이며 대학에 강의를 나가시는 K선생의 자택이었다.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속에 소박하고 정겨운 서민의 한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깊어진 고국에 대한 향수가, 귀국 후 전통적인 시골의 정서를 갖추고 있는 이 마을에 자리 잡게 된 동기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뜰에 흙 한줌,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소중히 여겨 그대로 보존하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우물가에 앵두, 복숭아나무, 장독대에 배나무, 뒤란에 살구나무, 앞뜰엔 대추나무, 갖가지 꽃나무와 열매 맺는 나무들이 차례대로 잎 틔우고 꽃 피우는 자연과 함께, 욕심 없이 살아가는 선생의 모습에서 옛 선비의 유유자적한 풍류를 느끼게 한다.

뒷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도 까만 오디가 풍성히 열려있는 뽕나무가 여러 그루 줄지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손이 타지 않아 열린 그대로 나무에서 농익은 진한 과일향이 주위에 은은히 퍼져있는 듯하다. 손에 몇 알 따서 입에 넣으니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그 맛을 따라 나의 기억은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인 1950년대 초, 피난 도중 우리 가족은 경기도 가평 근처의 어느 깊은 산골 집에 한 달여쯤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인가도 드문드문 있는 마을이라 주위에 학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마을 아이들 대여섯 명이 아침이면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십리 밖에 있는 천막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직 취학 전이지만 무턱대고 그 애들을 쫓아 다녔다. 산을 넘고 내를 건너기를 서너 차례, 학교 길은 멀고도 험했다. 도랑을 건너뛰다 가운데로 떨어져 늪에 빠지기도 하고 산길에 미끄러져 무릎에 피가 흐르기도 하며 천신만고 끝에 학교에 도착하면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였을까? 상처 난 산자락을 다듬어 만든 빈터에 미군 천막을 치고 책걸상 여남은 개를 가져다 놓은 것이 전부인 간이 강습소 같은 것이었다. 전시 중이라 전혀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크고 작은 애를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 모아놓고 선생님 한 분이 이것저것 두루두루 가르쳤다. 비가 오면 천막에서 비가 줄줄 진흙땅에 흘러내려 신발은 금세 흙투성이가 되곤 하였다. 칠판은 널따란 송판을 한가운데 걸어놓고 아이들이 집에서 긁어모은 솥 밑의 그을음 덩이를 발라 만들었으니 그 열악함이란 믿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우리는 그곳에서 가갸거교를 배우고 덧셈, 뺄셈을 알아갔다. 가르치려는 선생님과 배우려는 학생들의 열정만은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러나 배우는 즐거움도 잠깐, 아침부터 험한 산길을 달려온 터라 어느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싸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다행히 학교 주위에 몇 그루의 오디나무가 있어서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요깃거리가 되었다. 그때가 초여름이어서 나무 위에 오디가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틈만 나면 아이들은 모두 달려 나가 나무에 기어오르며 입술과 손이 잉크색이 되도록 오디를 따먹었다. 그러나 그들 중 제일 어리고 키가 작았던 나는 오디를 딸 수가 없었다.

어쩌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오디의 그 달콤한 맛은 허기진 배를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큰 아이들은 제 배가 너무 고팠던지라 나를 돌아볼 여유쯤은 애당초에 없었다. 나무 위에는 아무리 많은 오디가 다닥다닥 열려 있어도 그것은 나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갓 여유로워서 배고픈 우리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놀며놀며 온 산을 뒤졌다. 풀숲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산딸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가시에 긁히고 찔리면서도 딸기 넝쿨을 잡아 다녔고, 싱아, 삘기, 찔레순을 찾아 헤매느라 해지는 줄 몰랐다.

그렇게 동네 언니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강행군(?)에 참여했던 나는 불과 며칠 만에 심한 몸살로 앓아눕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병이 다 나은 후에도 더 이상 그 천막 학교에 따라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른 아침, 아이들이 골목길을 왁자지껄 누비며 뛰어갈 때, 허리에 동여맨 책보에서는 녹슨 생철필통 속의 몽당연필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이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다리던 나는 창문에 까치발을 들고 매달려 보았지만 무심한 아이들은 벌써 나를 잊은 듯했다. 그 후로는 입안에 넣으면 부드럽게 톡 터지는 달콤한 오디 맛도, 산 속에서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를 찾아내는 기쁨도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수복 후 서울로 돌아와 이른바 아스팔트 킨트(Asphalt-Kind)로 성장하여가는 나는, 험한 산 고개를 넘어 다니던 천막 학교의 며칠간이 마치 먼 꿈속의 한 장면인 듯 가끔씩 떠올라 향수처럼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들곤 했다.

홀로 뒤쳐져서 오디를 입에 물고 그 때를 회상해 보지만, 이젠 그 맛도 옛 맛이 아니고, 뽕나무에 열린 오디를 바라보며 그토록 애태우던, 철없던 단발머리 계집애도 어디로 갔는지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출처  거룩한빛광성교회 겨자씨>

더 많은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