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랜턴 대부인(Mary F.B. Scranton, 1832~1909)

2019 특별기획
한국에 온 여성 선교사②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국의 여성을 사랑한
스크랜턴 대부인(Mary F.B. Scranton, 1832~1909)

글 이덕주 명예교수(감신대)

이화학당

여성 교육과 선교의 기초를 놓다

한국감리교회 역사상 여성의 교육과 선교를 위해 가장 헌신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스크랜턴 대부인일 것이다. 그녀는 1885년 아들인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시란돈 施蘭敦, 1856∼1922) 의료 선교사와 함께 내한하여 1909년 별세하기까지 여성의 교육과 선교의 기초를 놓은 분이기도 하다.

스크랜턴 대부인과 관련된 자료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어떤 마음으로 선교에 임했기에 이도록 헌신적일 수 있을까?’

 

이화학당 교사(1880년대 말 촬영)

 

운산금광

 

시병원과 상동교회

 

스크랜턴

 

스크랜턴과 해리스

 

 

스크랜턴 대부인과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성을 자녀처럼

1898년 작성된 선교 보고서에는 그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다녀 온 지방은 거의 모두 이전부터 사역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 지역 부인들은 전에 받아들인 빛과 진리를 실낱 같이 붙들고 있었는데 이해하는 수준이 어린아이와 비슷하니 우리가 무엇을 더 기대하겠습니까? 읽을 수 있는 부인은 아주 적으며 (남녀구별-인용자) 시골풍습 때문에 별도의 집회공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여성들은 집회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 이런 남부지방 현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겁다 못해 찢어질 듯 아프기만 합니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버려두어야만 합니까? 지금 이곳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더 이상 시간을 쪼갤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자기 능력 이상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더 부담을 지어주라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 이 지역에 적어도 두 명의 선교사를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로 끝나지 않고 범죄가 될 것입니다. … 우리의 이 연약한 무리들은 1년 열두 달 중에 다만 한두 번이라도 모아서 제대로 훈련시켜 양육한다면 머지않아 이들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만한 분량의 영적인 자녀들이 될 것이며…….
– 이덕주, 『스크랜턴-어머니와 아들의 조선이야기』 중에서

아들과 함께 수원, 공주 지방을 다녀 온 후 스크랜턴 대부인은 여자 교인들이 처한 형편을 설명하면서 미감리회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 요청 속에는 한국 여성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여성들의 현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못해 찢어질 듯 아프기만’ 하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을 이방인처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처럼 여긴 것이다.

 

패티와 별단이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 선교도 앞서 한국 여성을 바라보았던 것과 같은 마음에 기초하고 있다.

1886년 봄, 정동에 병원 부지를 구입하여 건물 내부를 수리하고 6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첫 환자는 풍토 열병에 걸린 중환자였는데 우리는 그녀가 서대문 근방 성벽에 내팽개친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환자 옆에는 네 살배기 딸이 붙어 있었다. 우리 모두가 ‘패티’라 불렀던 그 환자는 작년(1897년)에 죽었지만 별단이로 불리는 그 딸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다.
– W. B. Scranton, “Historical Sketch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The Korean Repository (Jul. 1898)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어머니의 심정으로 양육하였다. 질병에 걸린 아이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하다 사망했지만 아이를 이화학당에 입학시켜 교육을 받게 하였을 뿐 아니라, 생활도 책임졌다.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크랜턴 고베 묘지

 

상동교회

 

1890년대 이화 학생들
1900년대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성의 교육과 선교의 기초를 놓은 스크랜턴 대부인

한국 여성 교육의 산실 이화학당

그녀는 1885년 10월에 자기 집 뒤 성벽 바로 안쪽에 있던 초가집 19채와 일대 언덕 부지를 구입하였다.

1886년 2월부터 부지 안에 있던 초가집들을 헐고 언덕을 깎아 새로운 건물 부지를 조성하고, 11월 교사 사택과 학생 기숙사 시설을 갖춘 ‘ㄷ’자 형의 한옥 건물을 완공하였다.

한옥 기와집으로 2백여 칸 되는 웅장한 교사가 마련된 것이다. 공사비는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 사는 교인 블랙스톤(W. E. Blackstone) 부인이 보내온 3천 달러와 미감리회 여선교회 뉴욕지회에서 보내온 7백 달러로 충당하였다. 이화학당은 이후 한국 여성 교육의 산실인 동시에 여성 선교의 구심점이 되었다.

 

여성 성경 공부와 여성 교회 설립

아픈 아이를 돌보는 심정으로 시작한 그녀의 선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 공부와 여성 교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남대문 달성위궁으로 거처를 옮겨 아들 스크랜턴과 함께 달성교회(상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동대문 볼드윈예배당 설립을 지원하였고, 수원과 이천, 공주 등지를 다니며 여성 선교와 각 지역의 교회 설립에 공헌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인근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되기 시작하자 이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여성이 필요하였다. 1893년 봄부터 상동교회 출신 여성과 ‘교리공부반’을 시작했고, 1894년부터 ‘부인성경학원’을 시작했다.

한국의 첫 여성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 교육을 받은 이경숙, 여메레, 백헬렌, 김세라 등 많은 전도 부인들이 서울과 경기도 인근 지역으로 퍼져 여성 선교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처럼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의 교육과 여성 선교, 그리고 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어떻게 이리도 헌신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었을까? 이런 이유로 그녀의 삶은 오늘의 교인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선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섬겨할 이웃으로 보는 것이다. 어머니의 심정으로 말이다.

이덕주 명예교수(감신대학교)

<출처  거룩한빛광성교회 겨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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