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리운 시절 “1964”

수필

참 그리운 시절 1964

글 김은숙 (수필가, 필명 김지형)

 

카미유 코로(1796~1875)의 작품 ‘모르트 퐁덴의 추억’

내 생애 최고의 한 해만 뽑으라면 나는 당연히 1964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시절이 그토록 아름다웠고 소중했음을 그땐 왜 몰랐을까!

오래 전 우리 집 거실에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 풍경화의 대가로 평가되는 프랑스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의 작품 <모르트 퐁덴의 추억>이다.

아련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득히 먼 시절 저편의 한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나에게도 마음속에 회상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흘러간 시절은 그것이 고통의 순간이었다 해도 그리워진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니 알게 되었다. 하물며 즐거웠던 시간들은 그립다 못해 마음이 저려오는 것이다.

어머니가 마을 공터에 초침이 긴 사발시계를 들고 저 멀리 서 있다. 나는 ‘시작!’ 하는 구호를 외치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린다. 100m 달리기, 중 고교 시절 운동신경이 느렸던 나는 반에서 늘 꼴찌를 면치 못했다.

시계의 긴 초침이 째깍째깍 울리는 소리에 따라 온 힘을 다해 달리기를 십 수차례, 영하의 날씨에도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연이어 넓이 뛰기, 공 던지기 등을 짧은 겨울 해가 이슥하도록 연습했다.

K대학 입시, 어려운 1차 필기시험에 합격을 하고 2차 체능과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도 2:1의 경쟁률이다.

체육에 취약한 나는 2차에서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어떻게든 합격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투혼을 다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격려하기 위해 추위를 마다않고 온 종일 시계를 들고 초를 재며 서 계셨다. 하늘에 석양이 물들면 어머니의 작은 키는 긴 실루엣으로 정물(靜物)처럼 드리워져 있다.

살아오면서 울적한 순간마다 왜 어머니의 그 모습이 슬프게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암갈색 바탕의 황량한 공터 위에 홀로 그렇게 서 있는 어머니, 열심히 뛰고 있는 나, 주위의 겨울나무는 앙상하여 바람조차 쉬어갈 수 없이 쓸쓸한 정경이 내 마음속 회상의 그림이다.

추억의 빛을 가장 잘 나타냈다는 <모르트 퐁덴의 추억>은 마치 꿈속처럼 잡힐 듯 말듯 아련함이 묻어난다.

호수위에 드리운 거대한 나무 그림자, 우거진 나뭇잎에 은은히 부서지는 햇살, 그 나무 아래서 가난한 차림의 한 여인이 열매를 따 주려고 까치발을 세워 팔을 뻗치고 있다.

그 아래 어린 두 소녀가 놀고 있다. 소녀들의 어머니인 듯한 이 여인에게서 평생 외로운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어머니에게 한 시라도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의 수 미터를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달려갔다. 날아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후로도 나는 그때의 희열을 내 평생 다시는 느껴보지 못했다.
1964년,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자유는, 대학이라는 넓고 새로운 캠퍼스에서 플래시 맨의 낭만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큰 그늘에서 아무 근심 없이 지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그 아름다웠던 날들의 고마움을 모르고 온갖 번뇌와 근심을 다 떠안은 듯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김승옥의 소설『1964년 겨울』의 인물처럼 소외된 도시인의 불만에 공감하며 시대의 불행을 내 것인 양 가장(?)한 것은 한낱 치졸한 사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뼈저리게 느낀다.

결혼을 해서 부양할 가족이 늘고 자녀가 생겨 내 책임의 영역이 넓혀지니, 매일이 힘들고 고단한 생활의 연속으로 정신없이 지낸 세월 속에 나이만 늘어갔다.

1964년 봄, 라일락 향기 짙은 상아탑에서의 축제, 가을엔 샐비어 붉게 핀 교정을 거닐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던 젊은 날의 추억들이 가슴 아프게 그리워진다.

내 생애 최고의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매 순간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 텐데, 인생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음을 이제와 깨달음이 무슨 소용 있으랴!

여러 번의 이사로 <모르트 퐁덴의 추억>의 그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마음속에 저장된 나의 그림만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어,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 마냥 서러워하고 있다.
  
출처 <겨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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