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가에 심은 나무

마음의 여유

글 한말숙(소설가)

요즈음처럼 노이로제니 스트레스니 하는 상태가 팽창하는 세상에 ‘마음의 여유’란 듣기만 해도 신선하고 황홀한 언어다. 내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나 집에서 “급하면 돌아서 가거라!” 혹은 “화나면 열까지 세어라!” 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그 뜻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리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전전긍긍하는가. 쇼크로 쓰러졌다느니 아니, 죽었다느니 하는 일까지 있지 않은가?

나에게 언제나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부럽다는 친구가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원고 마감 날이 지나고 또 지나서 더 이상의 연기가 어려울 때, 나는 잠깨기 시계를 새벽 두 시쯤에 맞춰놓고 열 시쯤부터 잔다. 시계가 자는 중에 요란스럽게 울리면 물론 잠깐 잠이 깬다. 잠은 깨나 머리가 띵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러면 자문자답한다.

‘너는 살려고 글을 쓰는가, 죽으려고 글을 쓰는가?’

‘그야 살려고 쓰지.’ ‘그러면 푹 자는 게 낫겠다.’ ‘그렇지!’

이런 식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메모까지 완전히 해 놓은 소설을 차일피일 쓰지 않고 미룬다. 이런 것을 과연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여유일까, 게으름일까?

일제 때 체력장이 있었다. 교정에 흰 선을 친 원을 여섯 바퀴 달리기를 하는데 두 바퀴를 도니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가빠서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열한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제기랄, 달리기 하는 것도 건강하기 위해서라는데 달리다 죽다니 본말전도(本末顚倒)야!’ 하고 생각하게 되자, 그만 코스를 이탈해 버렸다. 심판관 선생님은 내가 여섯 바퀴를 다 돈 줄 알고 “한말숙 일등!”하고 소리를 치며 칭찬을 했다. 친구들이 약이 올라 죽겠다고 법석을 치는 통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심판관 선생님에게로 가서 일등이 아니라, 죽을 것 같아서 포기한 것이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일본인 선생님은 “알았어, 알았어.” 하며 내 단발머리를 쓰다듬고는 돌아서 가버리셨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 지금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일등이건 포기건 마찬가지라는 뜻인지, 지금도 그 표정을 상기하면 그야말로 여유 있는 너그러움을 감득할 뿐이다.
인생사 매사는 대소를 막론하고 다 같이 소중해서 어느 일에건 성의를 다해서 대해야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두 손바닥으로 물을 풀 때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는 물은 그냥 흘려버리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는 것은 더러 잃으며 사는 것도 유연한 인생의 멋이 아닐까?

자신의 결점은 접어두고, 타인에게는 한 방울의 물도 줄 수 없다고 눈을 부릅뜨며 사는 인생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불쌍하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것이다. 나는 항상 인생은 길고, 오늘 안 되면 내일 되려니 하는 기분으로 산다. 안된들 또 어떠랴? 다만 성의를 다해 노력하고 있는가가 문제지, 결과는 나중 문제가 아닌가?

사진 박해준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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