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땅에 드리운 생명의 빛

[종교개혁주일 특집]

입술로 글월로 생명의 소식을 전한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

조선 땅에 드리운 생명의 빛

글 박현수(호남기독교박물관)

레이놀즈는 호남 지역의 남장로회 선교지를 개척하였고 그는 언어적 재능을 살려 한글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레이놀즈(W.D.Reynolds)
윌리엄 D. 레이놀즈는 1867년 12월 11일 버지니아(Virginia) 노포크(Norfolk)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레이놀즈 1세는 노포크 제2교회의 장로였고, 주일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냈다. 기독교 가풍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난 레이놀즈는 노포크(Norfolk) 중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어학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중등학교에서 라틴어와 희랍어,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햄튼시드니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네 개의 언어(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1890년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에 들어가 이 년간 신학 수업을 받은 후 1892년부터 1937년까지 사십오 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관련 사진 – ① 레이놀즈, ② 부인 팻시블링
③ 레이놀즈가 신학 수업을 한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레이놀즈 선교사
레이놀즈 부인 팻시블링
레이놀즈와 부인 팻시블링
레이놀즈가 신학 수업을 한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레이놀즈 선교 여행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2년 11월 3일 한국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일 년 이상 한국에서 적응 훈련과 언어 습득을 마치고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레이놀즈 선교사는 드루(A.D Drew) 선교사와 함께 6주간의 일정으로 전라도 답사에 나섰다.
1894년 3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인천에 도착 후 배편으로 군산에 갔다. 출발한 지 사흘 만에 군산항에 도착하였고, 임피를 거쳐 3월 31일에는 전주 은송리에 도착하였다. 다시 4월 9일 금구·태인을 답사하였고, 11일에는 정읍을 거쳐서 12일에는 흥덕·줄포·곰소를 둘러보았다. 이어 전남 영광, 무안, 목포를 지나 해남에 잠시 머물고(4월 20~22일) 진도, 고흥, 벌교를 지나 순천에 도착하였다. 그 후 미국 영사의 철수 요청에 따라 서울로 다시 귀환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라도 일대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전라도 답사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중요한 과업의 시작이었다.
관련 사진 – 레이놀즈 전라도 순회 전도

레이놀즈 전라도 순회 전도

레이놀즈의 교육 사업 – 신흥학교
1900년 9월 9일 레이놀즈 선교사는 그의 사랑채에서 한 소년(김창국)을 대상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 신흥학교가 시작되었다. 신흥학교는 1900년 개교 당시에는 신학문당이라 불리었고, 1904년 가을에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일대로 이전하였다. 이후 1908년 신흥학교로 개명하였다. 1909년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옛 희현당 자리에 2층 벽돌 양옥 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고 사립 신흥학교로 인가 받았다. 이 학교는 한강 이남 지역의 최초 근대 교육 시설이었다.
관련 사진 –
① 김창국 목사. 레이놀즈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소년 김창국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신흥학교가 세워졌다
② 신식 교육을 받고 있는 신흥학교 학생들
③ 신흥학교 학생들

김창국 목사(레이놀즈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소년 김창국을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신흥학교가 세워졌다)
신식 교육을 받고 있는 신흥학교 학생들(1915년)
신흥학교 학생들
신흥학예지(1966년)
폐교 당시 5학년 학생 전원이 학교를 상징하는 ‘S’자를 남김

 신흥 학예지(1966년)
1966년에 발행된 신흥학예지 제15호로 신흥학교 창립 제 65주년 기념호이다.
부록 편에 1937년 일제에 의한 강제 폐교 당시 학생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 전주 신흥학교 폐교 당시 5학년 학생들(1930년대)
식민통치가 날로 극심해지던 1930년 후반 신사참배 반대로 미국 남장로회 소속 열 개 학교가 1937년 자진 폐교하였다. 사진은 신흥학교 폐교 당시 5학년 학생 전원이 신흥학교의 영문 첫 자인 ‘S’자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
1900년 가을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의 평양공의회는 마펫(Samuel A. Moffett)의 제안에 따라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1901년 평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레이놀즈는 1905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온 레이놀즈의 주일 사역은 신학교 채플 예배를 인도하였고, 오후에는 영어 예배까지 인도하였다.
또한 레이놀즈가 목회한 곳은 평양 인근의 와산교회와 고정교회였는데, 레이놀즈는 오토바이를 타고 그 교회들을 번갈아 방문하며 목회하였다. 레이놀즈는 1933년 고정교회 교인 여덟 명과 와산교회 교인 다섯 명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다. 신학교 강의와 두 교회 외 평양 외국인학교 여자 상급반 수업,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특별예배 인도, 연합기독교대학(숭실) 채플 설교 등 임무를 맡았었다.
관련 사진
① 평양신학교
② 신학지남(1958년, 1961년, 1969년)
평양신학교에서 1918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대표적인 신학 잡지이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편집에 참여했다

신학지남(1958년, 1961년, 1969년)
최초 성경번역위원

레이놀즈의 한글 성경 번역
레이놀즈 선교사는 성경번역위원으로 한글성서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1893년 5월 12일 영국성서공회의 캔뮤어(A.Kenmure)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레이놀즈도 남장로교를 대표하여 상임성서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위원들은 성서를 번역하기로 하고 번역자회가 조직되었다. 레이놀즈는 1895년 10월 14일 번역자회에 참여하였다. 그 후 그는 1937년 구약개역작업이 끝날 때까지 성경번역사업에 종사하였다.
관련 사진 –
최초의 성경번역위원(1904년)

성경직해(1890년대)

성경직해 (1892년대)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육 년간 모두 아홉 권을 발행하였으며, 뮈텔(G. C. Mutel) 주교가 감준하였다. 천주교 성서의 한글 번역의 효시이며 개신교 초기 성서 번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책이다.
관련 사진 – 성경직해(1890년대)

레이놀즈의 한글 성경 번역 – 신약·구약 성서 번역
1900년 신약전서가 출간되어 신약개역작업과 구약성서 번역에 들어갔다. 구약성경 번역 작업이 부진하자 영국성서공회의 릿슨(Ritson) 총무와 미국성서공회의 팍스(Fox) 총무는 구약성경의 번역 작업을 위해 한국인 번역 조사 두 명을 번역자로 세워 레이놀즈와 함께 3인이 번역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1910년 3월 16일 구약성서 번역을 마쳤고, 교정 과정을 거쳐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번역을 완료하였다. 구약 번역을 시작한지 오 년 오 개월 십육 일 만의 일이다.
구약 번역 완료 다음해인 1911년 3월 구약성경이 2책 또는 3책으로 나누어 전체가 인쇄되었고 1911년 신,구약 성경의 번역이 완료되었다. 그 성경은 첫해 8천여 권이 팔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다. 1911년에는 다시 구약개역자회가 구성되었다. 레이놀즈는 1913년 다시 구약개역작업에 들어가 1937년까지 한글 성경 번역에 종사하였다.
관련 사진
① 전주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모습
② 구약개역 위원들(1900년대 초)

전주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모습
구약개역 위원들(1900년대 초)

 

박현수

글 박현수(호남기독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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