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욱의 서재-시가 끄는 수레

글 박선욱 안수집사(시인)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출전 : 김현승, 1957,『김현승시초』, 문학사상사

 

김현승 시인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은 목사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서 평양에 간 뒤 그곳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초기 시 세계는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민족적 낭만주의를 표방했지만 중기 이후에는 내면으로 파고드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신앙이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후기에는 고독과 사랑의 감정을 탐구하며 인간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 주력했습니다.

시에 대하여
기도의 의미가 투명하게 가슴속으로 날아드는 느낌을 줍니다. 기독교 전래 1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박해와 순교의 협곡이 있었지만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된장국 냄새 구수한 토착화의 밀도와 깊은 신앙의 향기가 우러나게 됩니다. 합창곡으로 부르며 수없이 가슴 뭉클해 하던 추억이 새삼 그리워지는, 한국의 기도 시 중 가히 으뜸의 자리에 있는 명시입니다.
사진 박해준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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