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지역 최초 교회 유성교회

아름다운 교회로의 여행

대전 지역 최초 교회
유성교회

글 김용기 사진 유성교회 제공

성도의 자발적인 헌신과 열정으로 세워진 교회

예수가 무엇인데 저렇게 극성일까? 1905~1906년 서양 종교에 호기심을 가진 한 젊은이가 지금의 공주에서 선교에 열정을 보이던 샤프 선교사를 찾아왔다. 그는 구한말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탕한 나날을 보내던 ‘이도명’이었다. 주변에서 술을 잘 먹기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한학과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이도명은 샤프 선교사를 만나고 타국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영접했다.

신현구 유성교회 목사님 부부

이도명은 “나 같이 불행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며 심경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여 방탕한 생활을 끝내고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섰다. 이도명은 샤프 선교사가 세운 사경반을 다니며 성령이 충만해져 회덕군 현내면 양촌에 조그만 집을 얻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인으로 변신했다.

이도명은 샤프 선교사가 시무하던 공주교회와 관계를 지속하며 유성 지역에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07년 처음으로 양촌에 <원동교회>를 세우고 이도명과 초대교인 이영서를 비롯해 다섯 명의 신도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이도명이 빌린 집에 세워진 원동교회는 이후 이영서의 집 사랑방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초가집을 구해 예배당을 꾸몄다. 그 집은 6간 규모의 추녀가 사방으로 둘러져 있는 말집 형태로 사랑방이 별채로 있어 선교사들이 전도하다 날이 저물면 자고 가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도들이 유성교회 앞마당에 세운 이도명 전도사 기념비
부흥회를 기념해 모인 성도들 뒤로 유성교회의 옛 모습이 보인다

대전 지역 복음의 씨앗, 지역 교회의 모태

원동교회는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해 오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유성 복명리에 있는 일본인이 거주하던 건물인 적산가옥을 인수해 이전했다. 한국 전쟁을 거치며 교인들이 흩어진데다 전쟁 이후에는 교회 건물이 경찰서로 사용되면서 예배 처소가 없어져 성도의 집을 오가며 예배를 드리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인근에 교회가 없던 때로 3~4km를 걸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많았는데 이정희 집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집사는 교회를 올 때마다 오래 걸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남편의 반대로 주일 예배 출석이 어렵게 되자 함께 교회에 다니던 장기생 씨의 헛간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예배는 후에 갈마동교회로 발전했다. 또한 궁동, 하학리 등 유성교회에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끔 출석을 못하게 되면 성가대가 그 지역으로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 때 출장 예배를 드렸던 곳은 하학교회 등 지역 교회로 성장해 유성교회가 지역 사회 복음의 씨앗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역 사회 섬김과 해외 선교로 복음의 빚 갚아

어려움 속에서도 예배와 기도를 그치지 않았던 유성교회는 교인들의 노력으로 경찰서로 이용되던 옛 원동교회의 부지를 교인들의 헌금으로 다시 구입해 교회를 복원했다. 그 터전에 1968년 70평 규모의 첫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대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돼 지역 사회에 믿음의 모체 역할을 담당해 온 유성교회는 2007년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지역 사회 섬김과 해외 선교를 통해 복음의 빚을 사랑과 헌신으로 갚고 있다. 지난 1994년부터 <사랑 나눔의 집>이란 무료 급식소를 개소해 주 4회 점심을 제공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2005년에는 교회 내에 의료 선교단을 창단해 해외 선교에 앞장서 필리핀 두마게티에 유성 카로이아한교회와 유성베데스다교회 예배당을 각각 신축해 봉헌하기도 했다.

신현구 담임목사는 “대전 지역 초대교회로 지역 사회에 믿음의 본을 보이며, 한결같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교회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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