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를 깨웠고 이제 우리가 그를 깨운다”

여름 특별기획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고대도에 온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그가 우리를 깨웠고 이제 우리가 그를 깨운다”

글 박노문 목사(고대도교회)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 같지 아니하였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귀츨라프의 ’조선 항해기‘ 중에서-

1832년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이다. 그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년, 의료 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다.

칼 귀츨라프

칼 귀츨라프
귀츨라프 선교사는 독일 프로이센 제국 프릿츠에서 경건한 기독교 가풍을 가진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프로이센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도움으로, 18세가 되던 해인 1821년 독일 최초의 선교사 양성 학교인 베를린선교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 4월부터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선교학교
귀츨라프는 베를린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회심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주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 즉 선교사에 대한 강한 사명을 확립했다.
그 후 귀츨라프는 1823년 부활절부터 베를린대학교(현:베를린훔볼트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중병으로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다. 그때 네덜란드선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중병도 그때 기적적으로 나았다.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출발한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을 거치면서 독립 선교사로 전환했다.

 

귀츨라프 선교 여행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다. 태국에서의 선교 기간 중 1831년은 귀츨라프에게 육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의 아내 메리 뉴엘이 그해 2월 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츨라프의 1차 아시아 선교 여행(1831. 6. 3~12. 13)은 이러한 슬픔을 만난 직후 행해졌는데, 방콕을 출발해서 마카오에 도착하기까지 낡은 중국 돛단배를 타고 중국 연안을 6개월 동안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교하였다.

귀츨라프가 타고 온 앰머스트호 모형

귀츨라프가 타고 온 범선 애머스트호 모형
조선을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 기간(1832. 2. 26~9. 5)인데, 마카오에서 출발했다.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경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의 연안이 눈에 들어왔으며 오후 5시경에는 처음으로 조선인들과의 우호적인 만남이 있었다. 귀츨라프가 타고 있는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최초로 정박한 곳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 앞이다.

애머스트호 항해길. 외연도→녹도→볼모도→고대도

 

고대도에서의 귀츨라프 행적을 기록한 조선의 책-승정원일기
고대도에서의 귀츨라프 행적을 기록한 조선의 책-비변사등록
고대도에서의 귀츨라프 행적을 기록한 조선의 책 일성록

 

고대도에서의 귀츨라프 행적을 기록한 조선의 책-조선왕조실록
귀츨라프 선교 여행
고대도

 

외연도→녹도→볼모도→고대도
애머스트호는 다시 남하하여 뱃길을 따라 외연도(7월 21일)-녹도(7월 22일)-불모도(7월 23일)-고대도(7월 25일) 순으로 항해하였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 8월 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으므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귀츨라프가 조선 순조에게 진상한 주기도문 ‘신천성서’

귀츨라프가 조선 순조에게 진상한 주기도문 ‘신천성서’
귀츨라프가 국왕을 위해 준비한 진상품에는 지리, 천문, 과학서 외에 천, 모직물, 망원경, 유리 그릇 등의 선물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한문 성경 한 권과 기독교 전도 책자들이었다. 특히 한문 성경은 ‘신천성서(神天聖書)’인데, 이 성경은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으로서 귀츨라프의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1823년 말라카(Malacca)에서 출판한 21권 낱권을 선장본으로 엮어 한 권으로 만든 성경이었다.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사역-주기도문 번역

귀츨라프 고대도 선교 사역 – 주기도문 번역
귀츨라프가 고대도를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은 문화적 중개 활동으로 이어졌다. 선교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7월 27일 귀츨라프는 오랜 설득 끝에 고관의 비서 양이(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다. 또한 그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 주면서 읽게 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귀츨라프는 2차 선교 여행 후 이 때 배운 한글을 1832년 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감자 파종법 전수
귀츨라프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빈궁한 삶을 사는 조선인들을 위해 감자를 직접 심고, 생산하는 방법을 글로 써 주었다. 이는 한반도 감자 전래의 최초의 구체적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이유로 야생 포도의 재배와 그것의 과즙 제조 방법도 설명해 주며 글로 써 주었다. 또한 그는 선교 사역의 한 방편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사람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면 이미 태국과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고, 어느 날은 독감에 걸린 60명의 노인 환자들에게 충분한 양의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선교지에서 의료적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열망이라고 하였는데, 그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선교의 방편이었다. 그가 만약 조선에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더라면 중국에서처럼 고아원과 학교 같은 사회적 봉사를 통한 선교를 더욱 체계적으로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츨라프의 조선 선교 사역을 기록한 책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비변사 등 4권 있어요. 4개의 사진 한데 묶어서 편집해주세요. 이 부분은 본문 글은 없고 제목과 사진으로만 편집해주세요.)

귀츨라프의 선교사적 의미
귀츨라프가 조선 선교 시에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처럼, ‘주님의 교회의 확산’을 소망한 것이다. 이는 선교 거점인 제주도를 사용하여 조선 선교,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를 피력한 것으로 한반도를 통한 개신교 선교 전략의 최초 입안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remote country)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 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되었다.

 

보령에 세운 기념비-귀츨라프의 중요 업적

보령에 세운 기념비 – 귀츨라프의 중요 업적
1. 최초로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
2. 최초로 한글 주기도문 번역 시도
3. 최초로 한문 성경과 한문 전도 서적 전달
4.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체계적으로 소개
5. 최초의 서양 감자 파종
6. 최초로 서양 선교사로서 서양 근대 의술을 베풂
7. 최초로 동북아를 위한 체계적 선교 전략 구성

 

고대도교회 박노문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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