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동자

수필

아이의 눈동자

글 김은숙 기자(수필가, 필명 김지형)


아이가 꽃을 보고 있다. 나는 꽃을 바라보는 그 맑고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다.
눈동자 속에도 한 송이 꽃이 피어있다. 아이는 그 꽃을 만질까 말까 조심스럽게 고사리 손을 가져간다. 때마침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꽃과 잎이 흔들리자 흠칫 놀라 가져가던 손을 거둔다. 얼굴에는 알 듯 말 듯 한 미소가 잔잔히 피어오른다. 미소와 꽃향기가 바람에 어우러져 내 가슴에 전해오니 잠시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

세상일이 어렵지 않은 일이 없다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 것이다.
오죽하면 애 보기 사흘 만에 동냥자루 도로 내달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육아를 위하여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접어야 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니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이제 그 고생은 끝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내 아이들이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내 몫으로 돌아왔다. 그 일은 내가 원치도 않는 사이에 내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잔이 되었다.

어려서 동생이 없던 나는 아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특히 앞집에 돌 지난 아이를 틈만 나면 데리고 놀았는데, 하루는 그 애가 끼고 있던 돌 반지가 없어졌다고 그 애 부모가 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반지가 그 집 상추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내 누명은 두고두고 벗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금은 땅에 떨어지면 숨는다는데 눈에 뜨인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우리 집 어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후 다시는 그 애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마치 실연을 당한 듯한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더니 이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복이 터졌나 하고 가끔 혼자서 실소할 때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긴 긴 해를 이 어린 것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가슴이 암담해져 온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뒤쫓아 다녀야 하고 아이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온갖 것을 다 끌어낸다.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그것들을 정리하고 치워야 한다.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아이의 울음은 문제의 해결 방법이다.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안 되면 벼락 치듯 울어 재낀다. 그 소리에 나는 두 손을 들고 만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무기이다.

특히 지수의 무기는 성능이 좋아 한 번 울면 아파트 전체가 떠나간다. 그 소리에 당해 낼 재간이 없어 무엇이든 얼른 들어주어야 한다. 고 어린 것이 언제나 나한테 백전백승이다. 저녁나절이면 내 몸은 물 적신 솜이 되어 무겁게 늘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쯤이면 아이가 제 어미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더 애 엄마를 기다리게 되어 시계에 자주 눈이 간다.
아이가 사람을 알아보고 사물을 알아가기 시작한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보는 물건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보고 싶어졌다.

눈동자를 유심히 보니 사물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밖에 나와 넓은 우주에 펼쳐져 있는 사물을 하나하나 새로이 보고 알아가는 순간마다 달라지는 눈동자의 빛은 신비하기까지 했다.

지수의 눈은 크지는 않지만 시력과 총기가 탁월하다.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좌우의 물건을 어느 틈엔가 보고, 밑을 보면서도 위에 있는 것을 알아, 놀랄 때가 많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아주 먼 곳에 떠 있는 애드벌룬도 가장 먼저 보고 신이 나서 손짓을 한다. 무얼 보고 그러나 어른들은 한참 찾아야 한다. 꽃과 풀을 볼 때 잔잔한 미소를 띤 듯 잔잔한 눈동자가 현대 문명이 낳은 기계류를 볼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달리는 자동차를 처음 보았을 때의 눈빛은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달리는 차 뒤꽁무니를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정신없이 바라보다 ‘후’ 하고 깊은숨까지 몰아쉰다.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부릉부릉’ 하고 오토바이 한 대가 뒤따르자 저건 또 뭐냐는 듯 예의 그 눈빛은 여전히 두려운 표정이다. 하루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헬리콥터 한 대가 낮게 비행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겁먹은 표정에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그 물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같은 하늘에서도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볼 때의 그윽한 눈동자와는 전혀 달랐다.

추석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 밤, 마을 공터 빈 벤치에 아이와 함께 앉아있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 아이가 손가락으로 둥근 달을 가리키며 ‘공, 공’하고 소리를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깡충깡충 춤까지 추어댄다. 눈동자는 빛을 발하듯 반짝거리고 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가를 간 적이 있다.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을 바라볼 때의 표정처럼 온화하다. 미동도 않고 서있는 아이의 얼굴이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하다. 그 작은 가슴이 자연과 동화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서있는 아이의 모습도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분명 아이의 눈동자는 자연을 바라볼 때와 문명의 이기를 바라볼 때 차이가 있었다.

하늘의 달, 별, 땅의 꽃과 풀 그리고 흐르는 강물, 이렇듯 신이 창조한 대자연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공통적으로 사랑과 온화함이 배어 있다. 반면 우리 곁을 무수히 달리는 자동차,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 텔레비전 등 인간이 발명한 물건들을 볼 때의 시선은 호기심과 두려움과 불안의 빛을 띠었다. 자연을 보는 시선은 정적이고 문명을 보는 시선은 동적이다.

아기도 자신이 본능적으로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일찍이 J.J 루소가 그의 교육론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연유를,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를 통하여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진 박해준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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