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나무들

수필

궁궐의 나무들

입하가 지난 이맘때면 창경궁 안의 느릅나무, 가죽나무, 말채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담장을 넘어와 담 밖의 플라타너스 잎과 어우러져 하늘을 덮어 아늑한 숲속 길 같은 장관을 이룬다. 담 밖의 세상을 알고 싶은 것일까!

글 김은숙(수필가, 필명 김지형)

오랜 세월의 풍상에도 변함없이 우리 궁궐을 푸르게 지켜주고 있는 것은 궐 안의 나무들이다. 나무가 없는 궁궐은 상상만 해도 얼마나 삭막한가!

궁을 지키던 옛 선조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갔어도, 나무들은 왕조의 영화와 쇠락을 묵묵히 지켜보며 오늘도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창경궁은 우리 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일제가 우리 궁을 격하시켜 동물원을 만들고 창경원이라 칭했던 시절이었다. 원숭이, 코끼리 등 동물들을 바라보며 철없이 즐거워하면서도 정작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는, 한 번도 그 이름을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 후 안국동에 있는 중고교로 통학할 때도 만원 버스 속에서 시달리며 창경궁을 거쳐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긴 궁궐 담 너머의 나무숲을 건성으로 바라보았고 그저 그 자리에 그렇게 당연히 있는 건가 보다고 무심히 여겼다.

입하가 지난 이맘때면 창경궁 안의 느릅나무, 가죽나무, 말채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담장을 넘어와 담 밖의 플라타너스 잎과 어우러져 하늘을 덮어 아늑한 숲속 길 같은 장관을 이룬다. 담 밖의 세상을 알고 싶은 것일까!
초여름 햇살이 눈부신 어느 날, 창경궁의 나무를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새 산수유, 개나리, 철쭉, 앵두꽃은 지고 싱그러운 신록이 푸르게 펼쳐져 있다. 궁궐 문을 들어서자 함인정 앞의 주목이 고풍스런 위용을 드러냈고, 담 옆의 향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춘당지(春塘池) 가는 길목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한 몸이 되어 연리지를 연상시키고 푸른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의 기둥은 오랜 세월에 고목이 되어 까맣게 타버린 속을 드러내고 있다. 곳곳에, 멋지게 휘어진 가지를 뻗어 낸 사철 푸른 우리 소나무들은 역시 궁궐의 주인공이다. 또한 황벽나무, 졸참나무, 팥배나무가 제각기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나무질이 견고하여 육모 방망이, 다듬이, 도마의 재료가 된다는 물박달나무는 한적한 궁 모퉁이에서 하늘로 솟은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외에 북한의 국화인 함박꽃나무와 귀룽나무, 잎이 하얗게 변하여 하얀 꽃을 피운 듯한 산딸나무, 가지를 꺾어 속을 밀면 국수가 나온다는 국수나무는 이름부터도 신기하기만 하다. 이외에도 궁을 지키는 나무들을 이루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문득 그 옛날, 벚꽃이 흐드러지다 못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절경과, 밤 벚꽃 놀이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그 많던 벚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중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며 궁 안길을 따라 퇴궐하는 길섶에 때마침 피어난 하얀 찔레꽃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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