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마음을 나누는 상심(上心)리교회

[아름다운 교회로의 여행] 한국의 초대교회

취재 김용기 기자 사진 출처 상심리교회 100년사

100년의 선교 역사를 담고있는-상심리교회
100년의 선교 역사를 담고있는-상심리교회

1900년대 초는 외세의 침략이란 혼란 속에서도 영적으로 커다란 성장을 경험한 시기였다. 1901년 신약이 완역되고, 1904년에 교정판이 나오면서 우리말 성경이 전파되기 시작한 해가 1905년이다.

참판 김희수가 가져온 성경
참판 김희수가 가져온 성경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상심리에도 이때를 즈음해 복음이 전파되었다. 참판을 지내고 고향으로 내려온 김희수가 서울에서 성경과 전도지를 가져와 당시 집안 청지기였던 차상진과 배운길, 노윤용, 노성원 등 7명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억지로 성경을 읽었으나 점차 성경에 매료되어 저녁마다 모여 성경말씀에 대한 토론을 하며 사랑방교회를 형성했다.

김 참판은 후에 예수 믿기를 포기하고 성경을 읽지 말도록 명령했으나 이미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차상진을 내쫓고 하나님을 믿는 소작인들의 토지를 몰수했다는 기록이 상심리교회 60년 사에 남아 있다.

 

복음의 씨앗 100배의 결실

또 다른 기록에는 성경을 편찬하고 보급하던 성서공회에 소속되어 하루 100리 길을 마다 않고 성경을 팔며 전도하기 위해 농촌을 다니던 권서(勸書)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11년 1월 영국 성서공회의 전도보고서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에 따르면 “권서 박 씨가 서울에서 100리쯤 떨어진 ‘고상한 생각이 있는 마을(The Town of Lofty Thinking)’이라는 의미의 상심리에 복음을 전했고,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복음을 받아들인 농부 배 씨는 동역자인 차 씨에게 “형제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서를 주셨으니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은혜를 갚을 수 없다”며 인근 지역에 전도를 시작했다. 이들은 박 권서와 함께 마을을 돌며 설교와 전도를 했고, 복음은 산불처럼 번져 나갔다. 상심리에서 시작한 작은 사랑방교회가 모체가 되어 주변의 다른 마을에 16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때의 결실로 112년이 지난 지금도 양평군에 고읍, 문호, 용문, 지평교회 등 100년이 넘는 초대교회가 즐비한 한국 선교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눈물의 장로

상심리교회의-발자취가 고스란히-담겨있는 귀중한-복음-자료들
상심리교회의-발자취가 고스란히-담겨있는 귀중한-복음-자료들

상심리교회는 설립 1년이 지난 1906년 교인의 수가 20명을 넘어 사랑방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배운길 부부가 기증한 땅에 첫 예배당을 건축했다. 1907년에 지어진 첫 예배당은 4간 반(8평) 정도의 초가 예배당으로 당시의 화폐로 약400원이란 거액이 들었지만 외부의 도움 없이 교인들의 손으로만 교회를 지었다.

배운길은 1912년 6월 장로가 되었고,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많이 흘려 ‘눈물의 장로’로 불렸다. 그는 전도를 다니며 여러 차례 몰매를 맞고, 따귀를 맞으면 다른 뺨을 돌려 대며 주님의 고난의 만 분의 일이라도 체험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역 교회의 어머니 교회

상심리교회의 또 다른 기록은 당회록이다. 두 번째 예배당이 건축되던 해인 1910년 5월 제1회 당회부터 1962년 1월 13일 당회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는 당회록 원본은 한국의 교회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1910년 이미 교인 100명을 넘어선 상심리교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종탑 헌납 사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굳건한 믿음을 지키며 양평, 남양주, 퇴계원에 10여 개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어머니와 같은 교회로 지역 사회 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가 마을, 마을이 교회

상심리교회는 1905년 설립 후 지금까지 여섯 번 교회를 증∙개축 했다. 특히 설립 100년이 되는 2005년에는 지금의 교회인 100주년 기념관을 자력으로 건립해 봉헌했다. 여섯 번 교회를 건립하면서도 단 한 번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교인들의 힘으로만 교회를 지었다는 자부심이 크다. 그 배경에는 마을과 교회의 밀접한 연대가 자리하고 있다. 상심리는 주민의 95% 이상이 교회에 나와 ‘예수마을’로 불릴 정도로 ‘교회가 곧 마을이고 마을이 곧 교회’란 생각이 마을 전체에 공유되고 있다. 교회를 지을 때에도, 여름성경학교처럼 교회 행사가 있을 때에도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도 부역과 물품을 서로 나누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회관을 지을 때 부지가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교회가 땅을 제공해 마을 회관을 지은 사례는 교회와 마을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올해로 28년 째 상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종환 목사는 “농촌 목회는 농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며 “마을의 문제가 곧 교회의 문제로 고충을 함께 풀어가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희망인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이 앞으로의 사명”이라는 한 목사는 “젊은이들이 마을에 정착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교육적 어려움이 없도록 교회가 나서 적극적으로 돕는 사역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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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 / 관광학 박사 농촌사랑지도자연수원 / 교수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8-27 HP: 010-7326-3840 | TEL: 031-961-0122 | FAX: 031-965-0348 http://blog.daum.net/ifarmlove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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